“하나둘 떠나는 자동차 인재들… 차마 붙잡지 못했죠”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29일 03시 00분


코멘트

한국GM 협력사들의 한숨
납품 물량 줄며 생산라인 썰렁… 은행 어음할인 외면 유동성 최악
2, 3차 협력사는 이미 문닫은 곳도
산은 “한국GM에 단기자금 지원”

한국GM 협력사 천일엔지니어링 조환수 대표가 27일 회사에 진열돼 있는 제품들과 GM에서 받은 상패를 바라보고 있다. 천일엔지니어링은 2012년부터 매년 ‘올해의 GM 협력사’로 선정됐다. 인천=변종국 기자 bjk@donga.com
한국GM 협력사 천일엔지니어링 조환수 대표가 27일 회사에 진열돼 있는 제품들과 GM에서 받은 상패를 바라보고 있다. 천일엔지니어링은 2012년부터 매년 ‘올해의 GM 협력사’로 선정됐다. 인천=변종국 기자 bjk@donga.com
“연구원이 공무원 시험 본다고 사표를 내는데 붙잡지 못하겠더라고요.”

27일 인천 남동구 남동공단에 위치한 천일엔지니어링. 사무실에서 만난 조환수 대표는 자체 개발한 자동차 엔진 부품을 만지며 멋쩍게 웃었다. 한국GM이 위기에 빠지면서 직원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1999년 설립된 천일엔지니어링은 플라스틱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회사로 GM에만 제품을 100% 납품하는 1차 협력사다. 대표 상품은 ‘워터 아웃렛’(엔진에 냉각수를 뿌리는 부품)과 ‘커버밸브보디’(엔진 오일의 누유를 막는 제품) 등이다. 금속이 아닌 고강도 플라스틱으로 만든 부품이어서 자동차 무게를 줄이고 비용을 대폭 줄일 수 있다. 기술과 품질을 인정받아 천일엔지니어링은 2012년부터 올해까지 매년 GM이 주는 ‘올해의 GM 협력사(SOY·Supply Of the Year)’에 선정됐다.

하지만 한국GM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한때 200명에 달하던 직원들이 현재는 165명만 남아있다. 조 대표는 “나간 직원들이 자동차 업계로 간 게 아니라 아예 다른 업계로 떠났다”며 아쉬워했다. 최근엔 연구개발(R&D)을 담당하던 연구원 2명도 회사를 그만뒀다. GM에 납품하는 특허 제품을 담당하던 이들은 한 명은 소방 관련 업체로, 또 다른 한 명은 공무원 시험을 보겠다며 나갔다. 조 대표는 “자동차산업 인력들이 업계를 떠난 것이 두고두고 아쉽다”고 말했다. 남동공단에 있는 또 다른 GM 협력업체 S사도 최근 매출 악화로 90명이었던 직원이 70명 정도로 줄었다.

2, 3차 협력사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최근 천일엔지니어링의 2차 협력사 대표는 고심 끝에 다음 달 공장 문을 닫기로 했다. 한국GM 물량이 줄자 2차 협력사가 버텨내지 못한 것이다. 조 대표는 “2차 협력사 중 3곳이 문을 닫았다. 오랫동안 함께 일한 동료들과 업체 직원들이 일자리를 잃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한국GM 사태가 빨리 해결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자동차산업협동조합에 따르면 매출 100%를 한국GM에 의존하는 협력사는 86곳으로 종업원 수는 1만8000여 명이다. 한국GM에 매출을 50% 이상 의존하는 기업은 150개가 넘는다. 협력사들은 한국GM이 없어지면 협력사 직원 약 16만 명이 일자리를 잃을 것으로 추산한다.

협력사들이 한국GM이 정상화되길 바라는 건 단순히 납품 물량 유지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GM이 협력사들의 제품을 보증해줘 GM 본사와 전 세계 GM 공장에 수출을 늘릴 수 있었다. 한국GM 협력사들이 GM 본사 등에 수출하는 규모는 연간 약 2조5000억 원 규모로 추산된다. 또 다른 협력사 신진화학의 문창호 대표는 “한국GM이 없어지면 수출은 사실상 끝난다고 보면 된다”고 한숨을 쉬었다. 2016년 GM 본사가 선정한 SOY 107개 업체 중 한국 기업은 27곳이었다.

협력사들의 자금 유동성도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협력사들은 납품 대금으로 한국GM에서 60일 만기 전자어음을 받는다. 이후 전자어음을 은행권에서 3%대 금리로 할인(외상채권담보매출·외담대)받아 운영 자금으로 쓴다. 그런데 최근 은행들이 어음 할인을 거부하고 있다. 본보가 한국GM 협력사들과 거래하는 시중은행의 외담대 한도를 분석해보니 2015년 말까지 약 7900억 원에 달하던 한국GM 협력사 대상 외담대 한도는 2016년 말 3500억 원, 지난해 말에는 1300억 원으로 줄었다. 유일하게 외담대 한도를 유지하고 있는 기업은행(1300억 원)을 빼면 사실상 나머지 은행 모두 대출한도를 0원으로 축소한 것이다. 한국GM 협력업체 오토젠 조홍신 대표이사는 “한국GM 협력사란 이유만으로 은행들이 대출한도를 축소해서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 도산 위기에 몰려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동걸 KDB산업은행 회장은 28일 긴급 기자간담회를 열고 “한국GM에는 다음 달 27일 4억5000만 달러의 부족 자금이 발생한다”며 “실사 기간 중 필요한 자금에 대해서는 산은이 지분(17.02%)만큼 브리지론 형태로 지원해줄 예정”이라고 밝혔다. 브리지론은 긴급한 자금 수요가 있을 때 내주는 단기 대출로, 지분으로 환산하면 산은의 부담액은 약 800억 원이다. 이 회장은 “브리지론은 5월 초 본계약이 체결되고 GM의 뉴 머니(신규 자금)가 들어오면 자동 해지(상환)된다”며 “담보, 이자율, 해지 요건 등은 GM과 산은이 동일한 조건으로 들어간다”고 말했다.

인천=변종국 bjk@donga.com / 강유현 기자
#한국gm#협력사#자동차#천일엔지니어링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