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이 한줄]내 안의 수많은 ‘씨앗’들… 그중 몇개나 싹 틔웠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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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리스본행 야간열차(파스칼 메르시어·들녘·2014년) 》

만화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는 좋아하는 여학생인 소연의 권유로 농구를 시작한다. 농구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지만 그는 ‘풋내기 슛(레이업 슛)’을 2만 번쯤 연습하며 실력을 쌓아간다. 강백호가 스펀지처럼 농구 기술을 흡수하며 성장할 수 있었던 건 그의 뛰어난 신체조건 덕분이었다. 만약 소연이 농구가 아닌 꽃꽂이나 서예를 권했다면 강백호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마 그의 재능은 빛바랜 사진첩처럼 먼지 쌓인 채 잊혀졌을 것이다.

사람들은 수많은 가능성의 씨앗을 품고 산다. 어떤 씨앗은 햇빛과 물을 만나 싹을 틔우지만 대부분의 씨앗은 깊숙한 곳에 묻혀 그저 가능성으로만 남는다. 나이가 든다는 건 그 가능성의 씨앗을 하나둘 묻어가는 일인지 모른다. 어린 시절 지도에서 처음 보는 도시의 이름을 외우며 오지 여행을 꿈꿨던 내가 낯선 곳에서 자는 걸 끔찍하게 여기는 어른이 된 것처럼.

이 책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스위스 베른에서 틀에 박힌 일상을 살던 사람이다. 그는 시계추처럼 정확하게 집과 학교를 오가며 고전어를 가르친다. 걸어 다니는 고전(古典) 같은 그를 사람들은 ‘파피루스’라고 부른다. 하지만 우연한 만남으로 인해 그는 충동적으로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는다. 한 포르투갈 의사의 생애를 뒤쫓으며 그는 잊고 있던 자신과 만난다. 모래바람이 부는 이스파한(이란)을 갈망했던, ‘지금의 나’와 전혀 다른 ‘예전의 나’를.

삶의 무게가 너무 버겁게 느껴진다면 잠시 ‘지금의 나’에게서 도망쳐 보는 건 어떨까. 그레고리우스처럼 거창한 여행이 아니라도 좋다. 그저 평소에 해본 적 없는 소소한 일탈도 메마른 삶에 촉촉함을 더해줄 수 있다. ‘나답지 않은 행동에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접어두자. 오래전부터 당신 안에서 기다려온 작은 씨앗이 비로소 싹을 틔운 것뿐이니까.

주애진 기자 jaj@donga.com
#리스본행 야간열차#씨앗#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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