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탄생 100주년]중동진출부터 소떼 방북까지… 그가 가면 ‘길’이 되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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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이 남긴 유산들

아산과 같은 기업인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은 굴곡의 현대사와 함께 살면서 그 자신이 현대사 그 자체가 됐다. 현대건설을 이끌며 중동 진출 등 기적과 같은 수많은 성공스토리를 이끌었고, 현대아산을 통해 남북경협에 앞장선 동시에 재단과 병원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지 및 의료혜택을 베풀기도 했다. 자신이 나고 자란 나라와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잊지 않았던 정 명예회장의 행보는 후일 정치인의 길로도 이어지게 된다.

비록 대선의 길에서 좌절을 맛봤지만, 그가 이 사회에 남긴 수많은 족적과 유산들은 사실 웬만한 대통령이 남긴 그것과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들을 다시 되돌아본다.
직원과 씨름하는 정주영 강릉 경포대에서 열린 하계수련회에서 직원들과 씨름을 하고 있는 정주영 명예회장. 현대자동차그룹 제공
직원과 씨름하는 정주영 강릉 경포대에서 열린 하계수련회에서 직원들과 씨름을 하고 있는 정주영 명예회장. 현대자동차그룹 제공

태국 공사 경험 바탕으로 중동진출 교두보 마련

1960년대 초 4·19와 5·16 등 두 차례 큰 정치혼란을 겪으면서 기간산업 개발자금이 부족해진 정부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일 수가 없었다. 결국 정 명예회장은 현대건설의 해외 진출을 추진하게 된다. 현대건설은 1965년 9월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했다. 고속도로도 없던 나라가 해외에서 고속도로를 만들게 된 것이다.

정 명예회장이 해외 진출을 적극 추진한 데는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해외에 나가 선진 기술을 익힘으로써 기술혁신을 이룩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국내 건설의 침체로 둔화된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는 일이었다. 손해를 볼까 봐 해외 진출을 두려워하는 중역들도 있었지만, 정 명예회장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모험을 감행했다.

당시 태국에는 서독, 이탈리아, 덴마크 등 외국의 선진 건설업체가 대거 진출해 있었고, 그들은 최신식 공법에 최신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현대건설은 국내에서 가지고 나간 재래식 장비로 고속도로를 건설해야 할 처지였다. 최신식 장비를 구입해 보았지만, 기능공들은 사용법을 잘 몰라서 두 달도 못 가 고장을 내기 일쑤였다.

결국 이 공사는 현대건설에 빚만 잔뜩 안겨다 주었다. 하지만 이 공사를 하면서 현대건설은 전동식 롤러나 컴프레서 믹서 등을 직접 고안해 만들어 썼으며, 최신 장비 사용법과 선진 공법을 익혀 후일 한국의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기술력을 완벽하게 갖출 수 있었다. 또 이후 ‘월남특수’를 비롯해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각종 공사를 수주하는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1970년대 석유파동이 닥쳐왔다. 현대건설도 울산에 조선소를 지으면서 대대적인 투자가 이뤄져 자금사정이 많이 악화된 상황이었다. 정 명예회장은 활로를 찾기 위해 부심하던 중 ‘달러를 벌기 위해서는 중동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달러가 세계 최대의 석유시장인 중동으로 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국 때와 마찬가지로 반대가 빗발쳤다. “중동은 위험합니다. 지금 중동에는 세계 굴지의 선진 건설사들이 진을 치고 있어 우리가 발붙이기 쉽지 않습니다.” 당시 현대건설 해외담당 중역은 이렇게 강력하게 반대를 하고 나섰다. 1975년까지만 해도 중동 건설 시장에서 수주를 한 한국 건설회사는 단 한 곳뿐이었다.

그러나 정 명예회장의 뚝심은 차츰 효력을 발휘했다. 작은 규모의 조선소 공사 수주를 시작으로 차츰 규모를 키워가더니, 1976년 ‘20세기 최대의 역사’로 알려진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산업항 수주전에서 당시 한국 총 예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9억3114만 달러에 수주를 해낸다.

이 공사는 콘크리트 소요량만 5t 트럭으로 연 20만 대분, 철강재만 1만 t짜리 선박 12척 분이 들어가는 대공사였다. 작업 현장과 한국의 거리가 멀다는 점에 고민하던 정 명예회장은 모든 자재를 국내에서 송출한다는 결단을 내린다. 정확히는 자재가 아니라 아예 구조물을 울산 조선소에서 제작해 배로 35일이 걸리는 공사현장까지 싣고 온다는 계획이었다.

역시나 반대가 많았지만 정 명예회장 특유의 ‘해봤어?’ 정신으로 계획은 실행에 옮겨졌다. ‘재킷’이라는 철 구조물은 가로 18m, 세로20m, 높이 36m로 무게가 550t인 크기였는데, 웬만한 10층 빌딩과 맞먹는 수준이다. 이런 재킷이 89개가 필요했는데, 현대건설은 이 재킷을 배에 실어 19번에 걸쳐 큰 사고 없이 수송에 성공해 외국 건설사들이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정 명예회장의 경영방식은 이처럼 ‘불도저’식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창의적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1984년 이뤄진 서산간척지 최종 물막이 공사다. 물살이 빨라 바윗덩어리를 던져 넣어도 금세 물살에 쓸려 내려가 최종 270m를 남기고 공사가 중단됐다. 그러자 정 명예회장은 폐유조선으로 물살을 막아내는 ‘정주영 공법’을 창안해낸다. 이 공법은 미국 ‘뉴스위크’지와 ‘타임’지에 소개되기도 했다.

소떼방북 트럭 행렬 1998년 이뤄진 정주영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 모습. 소를 실은 트럭들이 줄지어 북쪽을 향해가고 있다. 동아일보 DB
소떼방북 트럭 행렬 1998년 이뤄진 정주영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 모습. 소를 실은 트럭들이 줄지어 북쪽을 향해가고 있다. 동아일보 DB


소떼 1001마리 몰고 고향으로… 병원지어 의료복지 앞장

정 명예회장은 남북 경협사업에도 가장 앞장섰던 기업인이었다.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바로 ‘소떼 방북’. 1998년 2월 정몽헌 당시 현대건설 회장이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북한과 접촉했고, 4개월 뒤 정 명예회장이 소 500마리를 몰고 휴전선을 건넜다. 지금은 북한에 속한 강원 통천 출신의 정 명예회장은 1차 방북 4개월 후인 그 해 10월에는 소 501마리를 몰고 2차 방북을 했다. 총 1001마리를 몰고 간 것인데, 잘 알려진 대로 정 명예회장은 17세 때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부친이 소 1마리를 판 돈 70원을 훔쳐 서울로 가출한 바 있다. 그때의 빚을 갚는 마음으로 1마리 원금에 1000마리 이자를 보탠 셈이다.

2차 방북이 이뤄진 다음 달 금강산 관광이 개시됐고, 이듬해 2월에는 본인의 호를 딴 ‘현대아산’을 창립하고 대북사업을 담당하게 한다. 관광 10주년을 앞두고 ‘박왕자 씨 피격 사건’이 발생하면서 금강산 관광은 중단됐지만, 여전히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감격의 장소이자 남북경협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또 남북 간 대화가 시작되면 현대아산의 모기업인 현대상선의 주가가 급등할 만큼 여전히 금강산 관광 재개에 대한 기대감도 식지 않은 상태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간직했던 정 명예회장은 1977년 7월 현대그룹의 모회사인 현대건설 창립 30주년을 맞아 사재를 출연해 공익재단인 ‘아산재단’을 세운다. ‘우리 사회의 가장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는 설립 취지에 따라 다양한 복지사업을 펼쳤는데, 설립 초 현대적 의료시설이 열악했던 정읍, 보성, 보령, 영덕, 홍천, 강릉 등 농어촌 지역을 비롯해 전국에 8개의 대규모 종합병원을 세웠다. 이 중 1989년 6월 개원한 서울아산병원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국내 최고 수준의 병원으로 발돋움해 국내 의료기술과 병원문화를 이끌고 있다.

김성규 기자 sungg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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