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심리에 현금 차곡차곡… 정부 돈 풀어도 경기는 ‘냉골’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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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는 ‘장롱경제’]

#1. 서울 서초구 잠원동에 사는 주부 이모 씨(58)는 최근 노후자금을 보관할 개인용 금고를 하나 구입했다. 남편이 은행에서 갑작스럽게 퇴직하면서 “있는 돈이라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이 씨는 원금 손실을 막기 위해 주식, 펀드 등에 투자하려던 생각도 접었다. 그저 은행 예금에 일부 돈을 쌓아두고 나머지는 집 안 금고에 현금 뭉치와 달러, 골드바로 보관하고 있다. 이 씨는 “여유자금이 있긴 하지만 어떻게든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쇼핑이나 외식도 자연스레 줄이고 있다”고 말했다.

#2.
중견 기업에 다니며 세전 기준 월 500만 원가량의 수입을 올리는 강모 씨(38)는 소득의 40%인 200만 원 정도를 정기예금에 다달이 붓고 있다. 자신이 사는 서울 강남지역 아파트 전셋값이 2년마다 4000만∼5000만 원씩 뛰고 있어 다음 재계약 때까지 돈을 마련해놔야 하기 때문이다. 돈을 쓰고 싶은 곳은 많지만 늘어나는 주거비를 대느라 ‘강제 저축’을 하는 셈이다. 강 씨는 “세금 등을 떼면 월급에서 실제로 쓸 수 있는 돈은 절반도 안 된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 가계·기업 모두 안 쓰고 버티기

새 정부가 출범한 2013년부터 정부는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고 기준금리를 세 차례 내렸다. 돈을 풀어 꺼져가는 경기를 되살려 보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정부와 한국은행이 시중에 푼 돈은 가계의 소비증가, 기업의 공장 설립 등에 쓰이지 않고 상당 부분이 은행이나 개인금고에서 조용히 잠자고 있다. 특히 상당수의 가계는 막대한 빚을 갚고 전세금을 대느라 저축할 엄두조차 못 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가계의 평균소비성향(가처분소득 대비 소비지출액)은 2005년 77.9%에서 지난해 72.9%까지 떨어졌다.

가계가 지갑을 닫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경기 회복에 대한 의구심이 커졌다는 점이다. 한은의 소비자동향조사에 따르면 국내 소비자들의 ‘향후 경기전망’ 지수는 올해 2월 87로 6개월 전인 지난해 8월(100)보다 13%나 떨어졌다. 이런 비관적인 경제 전망은 연금과 복지 혜택이 부족한 국내 가계의 노후 불안심리를 더욱 자극하고 있다.

저물가의 지속도 가계소비를 억제하는 요인이다. 물가가 오르지 않거나 하락하는 상황에서는 상대적으로 돈의 가치가 높아지기 때문에 현금을 보유하는 게 유리하다. 이에 따라 물가는 다시 하락 압력을 받는다. 이처럼 저물가는 내수 경기와 물고 물리면서 ‘장롱 경제’ 현상의 원인이자 결과로 작용한다.

투자처를 찾지 못한 단기부동자금이 최근 늘어나는 것도 시중에 돈이 돌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대기업 회사원 김모 씨(48)는 여유자금 2억5000만 원가량을 3년째 머니마켓펀드(MMF)에만 넣어놓고 있다. MMF는 급할 때 언제든지 돈을 꺼내 쓸 수 있는 초단기 금융상품으로, 향후 경기 상황에 대한 불안감이 높을 때 인기를 끈다.

○ 정부 당국의 팀워크로 풀어야


시중에 풀린 돈이 장롱 속에서 잠자는 ‘장롱 경제 현상’이 지속되다 보면 한은이 금리를 내리고 정부가 돈을 풀어도 경기가 나아지지 않는 ‘유동성 함정’에 빠질 위험이 커진다. 경제 활력이 현저히 떨어져 어떤 정책수단으로도 경기활성화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는 뜻이다.

이런 현상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마다 처방이 제각각이다. 정부가 보다 과감하게 돈을 풀어야 한다는 주문이 있는가 하면 통화정책에만 의존하지 말고 구조개혁의 내실을 기해야 할 때라는 의견도 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한은이 ‘찔끔찔끔’ 마지못해 기준금리를 인하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문제”라며 “디플레이션에 맞서 강력히 싸우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차원에서 과감한 금리 인하를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역시 양적완화와 금리 인하를 통해 ‘돈맥경화’ 현상을 어느 정도 완화시킨 적이 있다.

위축된 소비 및 투자심리를 회복하려면 정부 당국의 ‘팀워크’가 절실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강명헌 단국대 교수는 “금리 정책만으로는 안 되며 정부와 한은이 머리를 맞대고 총체적인 정책 ‘패키지’를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천구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경제 주체들의 자신감을 회복시키는 게 우선”이라며 “은행들에 대한 여신규제도 완화해 금융기관의 돈이 진정으로 필요한 곳에 흘러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장윤정 yunjung@donga.com·유재동 기자
#불암심리#장롱경제#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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