꺾기 규제의 역설… 中企 돈줄 오히려 막아

  • 동아일보

임원이 한달 전후 예금 가입땐 신규대출-만기연장 꺾기로 간주
기업들 정상적 거래 못해 울상
금융당국 “부작용 인정… 제도 보완”

경기지역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A 씨는 최근 회사 대출의 만기를 연장하기 위해 주거래은행을 찾았다가 헛걸음을 했다. 은행 직원은 “만기를 연장하려면 모든 등기임원들이 개인정보 조회를 위한 동의서를 내야 한다”며 “조회 결과 임원들이 우리 은행에 예금이나 펀드에 가입한 사실이 확인되면 연장을 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당국이 대출을 미끼로 예금을 강요하는 ‘꺾기(구속성 예금)’로 볼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A 씨는 “우린 등기임원이 6명이나 되고 대부분 비상근이라 전국에 흩어져있다. 한시가 급한데 언제 일일이 동의서를 다 받으란 말이냐”며 따졌다. 하지만 “요즘 규제가 강화돼서 우리도 어쩔 수 없다. 이해해 달라”는 은행 직원의 말만 돌아왔다.

○ “꺾기 규제로 대출받기 더 어려워져”

A 씨가 겪은 일은 최근 시중은행의 지점 창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지난달 관련 법령이 개정되면서 꺾기 관련 규제가 강화됐다. 은행이 중소기업에 신규대출이나 만기연장을 해줄 때 그 시점을 기준으로 전후 한 달간 기업 대표와 등기임원들이 해당 은행의 수신 상품에 가입한 기록이 있으면, 금융당국은 이를 꺾기로 간주하고 은행을 처벌한다.

규제는 ‘중소기업 보호’라는 선의(善意)에서 출발했지만 기업들 사이에선 “대출받기가 더 힘들어졌다”는 푸념이 나오고 있다. 은행들은 대출을 원하는 기업임원들의 통장 내역을 일일이 들여다보기 위해 이들의 개인정보를 조회해도 좋다는 자필동의서를 요구하고 있다. 기업이 동의서를 제 날짜에 마련하지 못해 돈이 필요한 때 대출을 못 받는 일도 벌어진다.

중소기업은 여러 은행에서 대출을 받기 때문에 기업 임원들이 꺾기 규제를 피해 개인 자격으로 은행에서 예·적금이나 펀드를 드는 것도 사실상 어렵다. A 씨는 “법인 대출의 만기연장은 1년에 5, 6차례씩 돌아온다. 앞뒤 한 달을 빼면 1년 내내 개인적으로 은행상품에 가입할 수 있는 날이 거의 없는 셈”이라며 “아무리 ‘자발적 가입’이라 해도 이를 증명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은행들도 볼멘소리를 한다. 시중은행 영업점의 대출담당 직원 김모 씨는 “대출 건건이 매번 동의서를 받는 절차를 반복해야 한다”며 “규제 강화로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이 위축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 부작용 늘리는 ‘선의의 규제’

금융당국은 날이 갈수록 교활해지는 꺾기 관행을 차단하려면 규제가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과거 꺾기의 타깃이 법인이나 회사 대표에 집중됐다면 지금은 임직원들에게 상품 가입을 강요하는 ‘신종 꺾기’가 성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의도만 좋은 어설픈 규제가 약자를 보호하기는커녕 엉뚱한 피해자만 늘리는 ‘규제의 역설’이 꺾기규제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골목상권을 살리기 위한 대형마트 영업규제가 대형마트 일자리를 줄이고, 중소기업에 혜택을 준다며 공항 면세점 사업에 대기업 참여를 제한한 규제가 외국계 기업에 반사이익을 주는 일과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금융당국도 꺾기규제 방식이 섬세하지 못해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금융위원회 당국자는 “제도 시행 이후 ‘꺾기’ 피해가 줄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면서도 “다만 실무적으로 기업들의 불편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 꺾기(구속성 예금) ::

시중은행이 대출자에게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예·적금, 보험이나 펀드 등 금융상품을 강매하는 행위. 금융당국은 ‘꺾기’로 적발된 은행에 일정액의 과태료를 물리고 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꺾기 규제#중소기업#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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