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A증권사. 상담 창구에 앉은 영업부 직원 이모 씨(26·여)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고객님. 죄송하지만 밖에서 만나는 건 힘들어요.”
이 씨 앞에는 2주 전 펀드 상품을 계약한 고객이 앉아있다. 당시 남자가 웃으며 ‘데이트’를 요구할 때만 해도 이 씨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당신 나한테 펀드 수익률도 제대로 안 알려줬잖아. 그거 규정 위반인 거 몰라? 그냥 금융감독원에 찌를까?” 남자의 목소리는 협박조로 변해갔다.
이 씨의 얼굴은 사색이 됐다. 상반기에 불친절 지점으로 꼽혀 본사의 지적을 받았던 기억이 났다. 이 씨가 당혹스러워하는 사이 남자는 메모지에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를 적어 건넸다.
# ‘따르릉’
지난해 5월 B증권사의 서울 구로지점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직원이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의 50대 남성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들이 고객 알기를 우습게 알고. 사장 바꿔!”
그는 증권사 지점이 추천한 종목에 투자해 400만 원을 손해 봤다며 매일 같은 시간에 전화를 걸어 왔다. 결국 지점장까지 나섰다. “고객님 진정하시고요. 뭘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전화를 건 남성이 나지막이 말했다. “딱 200만 원만 물어줘. 그럼 다시는 안 괴롭힐게.”
금융투자업계에 블랙컨슈머(악성 소비자) 주의보가 발령됐다. 각 회사들은 업황이 부진한 가운데 블랙컨슈머가 회사에 악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골머리를 앓고 있다.
블랙컨슈머의 종류는 다양하다. 단순 업무방해로 그칠 때도 있지만 ‘민원’을 빌미로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거나 성희롱까지 일삼는다. 직원들이 블랙컨슈머에게 꼼짝 못하는 것은 민원의 영향이 크다. 민원이 발생하면 직원뿐 아니라 지점과 본사에도 피해가 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민원이 많은 직원과 지점은 인사평가에서 불이익을 받는다. 본사에서 악성 상습민원임을 알더라도 민원이 지나치게 많으면 직원 평가 때 감점이 불가피하다. 회사에 따라 민원이 많은 하위 10%인 직원과 지점은 우수사원, 우수지점 선정에서 제외된다.
본사도 자유롭지 않다. 각 회사는 금융감독원이 매년 발표하는 민원발생평가등급(1∼5등급)을 홈페이지에 공시하게끔 돼 있다. 블랙컨슈머가 금감원에 민원을 넣어 등급이 낮아지면 민원 감축 계획안을 만들어 제출하거나 금감원 직원의 현장 방문을 받아야 한다. 물론 회사 이미지도 나빠진다.
이 때문에 대부분 회사는 주유상품권, 홍삼절편 등 블랙컨슈머를 위한 ‘당근’을 미리 준비해 사태가 길어지는 걸 방지하기도 한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회사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담당 직원이 사비로 고객과 ‘합의’를 보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하소연했다.
금감원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접수 민원은 4만7494건으로 전년 동기 대비 27.7% 늘었다. 업계에서는 이 중 5% 정도가 블랙컨슈머의 상습민원인 것으로 추정한다. 관계당국은 블랙컨슈머를 근절할 만한 대책을 내놓지 못한다. 금감원 관계자는 “블랙컨슈머를 관리하려면 각 회사에서 공동으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야 한다”며 “개인정보 관리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투자자의 선의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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