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Up]잘나가던 강남 공인중개사 “작년 1건도 못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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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1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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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부동산 한파… 벼랑끝 공인중개사 24시

“얼마나 풍년이 들려고….” 새해부터 쏟아진 눈이 찬바람에 꽁꽁 얼어버린 골목길을 내다보던 김모 사장(48)이 혼잣말을 내뱉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울 용산구 갈월동에 자리한 공인중개사무소에 미끄러운 길을 밟고 며칠 만에 손님이 찾아온 것. 1억 원 미만의 전셋집을 구하는 청년에게 서둘러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놓았다.

주변 원룸 주인들에게 부지런히 전화를 돌리던 김 사장은 “지난해 매매를 성사시킨 게 고작 2건”이라며 “전세라도 찾는 손님이 이리 반가울 수 없다”고 말했다. 한창 잘나갈 땐 한 달에 한 건씩 매매를 성사시켰지만 요즘은 1년에 한 건 하면 잘한 편이라는 게 김 사장의 전언이다.

공인중개사는 1999년 육군 소령에서 예편한 그가 어렵사리 찾은 ‘제2의 인생’이었다. 군대를 떠나 처음 택한 사업은 사진관. 순조로운 듯했던 사업은 사진관이 자리한 종로구청 일대 도심이 재개발되면서 접을 수밖에 없었다. 버티고 버티다 쫓겨나면서 그가 손에 쥔 건 애초 지불했던 권리금 1억 원과 보증금 2000만 원 중 몇백만 원뿐이었다. 재개발 소식도, 권리금은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것도 몰랐던 그가 억울해서 시작한 게 공인중개사 공부다. 나이를 먹어서 활동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아 보였다.

2007년 공인중개사로 변신한 그에게 ‘좋은 시절’은 길지 않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부동산 경기가 급락하면서 하루 벌어 하루 먹기도 힘들어졌다. 보다 못한 아내가 초등학교 특별활동 교사로 돈벌이에 나섰지만 생계가 막막하긴 마찬가지다.

결국 지난해 그는 자동차보험설계사 명함도 팠다. 아침에 보험사 사무실로 출근해 영업을 뛰는 동안 아내가 사무소를 책임진다. 저녁이 되면 그가 공인중개사무소로 돌아와 아내가 해둔 일을 법률적으로 검토한다. 두 직업 모두 몸이 고생하는 만큼 수입이 들어오기에 몸살이 날 때도 있지만 한 달에 200만 원이라는 보험설계사 수당을 놓칠 순 없다. “사무소 월 임차료가 60만 원, 통신비, 전기료가 고정비용으로 나가기 때문에 만약 설계사를 안 했더라면 사무소 유지조차 힘들었을 겁니다.”

‘은퇴자의 희망’이었던 공인중개사의 위상이 부동산 한파 속에 수직 추락하고 있다. ‘부동산 1번지’인 강남에서조차 지난해 매매실적이 ‘제로’인 곳이 수두룩하다. ‘제2의 인생’을 기대했던 퇴직 공인중개사들 중 일부는 ‘투잡족’으로 변신했고, 문을 닫는 업소도 속출하고 있다.

○ 폐업이 신규보다 많은 강남 공인중개사무소

“폐업하신다고요? 부동산을 넘기시려면 공인중개사협회 홈페이지에서 정보를 공유하실 수 있습니다.”

4일 오후 찾은 서울 강남구 개포동 최현진 공인중개사협회 강남지회장의 공인중개사무소. 10분 남짓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사무소에는 ‘폐업 문의’를 하는 공인중개사무소들의 전화가 줄을 이었다. 지난해 12월엔 처음으로 강남 공인중개사무소 폐업 건수가 신규 건수의 2배를 웃돌았다.
▼ 부동산 한파… 벼랑끝 공인중개사 24시 ▼

한때 ‘국민 자격증’… 응시자 절반 뚝
수도권 중개업자 4년만에 9.4% 줄어


최 지회장은 “지금까지 공인중개사들이 어떻게든 버텼다면 이제 한계상황에 이른 것”이라며 “강남지회 소속 공인중개사들의 지난해 1∼9월 평균 매매 건수를 살펴봤더니 평균 0.9건이었는데 연말까지도 1건 남짓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평균이 그렇다면 매매 거래를 1건도 성사시키지 못한 사무소들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폐업으로 가기 전 생존을 위한 몸부림도 다양했다. 대리운전사나 보험설계사처럼 시간 활용이 자유롭고 실적에 따라 돈을 버는 일로 ‘투잡’을 뛰거나 직원을 해고하고 ‘단독 체제’로 구조조정한 곳도 많다. 전세 수요자를 잡을 수 있는 전국의 새 아파트만 옮겨 다니는 공인중개사도 생겨났다. 일명 ‘입주 장사’. 단기 월세로 사무소를 차려 신규 아파트 주인들을 접촉해 전세 계약을 성공시키고 또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가는 식이다.

안완서 강북지회장은 “다른 지역에 가면 조금 낫지 않을까 기대감을 품고 별다른 계획도 없이 이곳저곳 계속 옮겨 다니는 사람도 많다”고 전했다. 공인중개사들 사이엔 새 정부가 들어서면 부동산 경기가 좀 나아지리라는 기대도 한때 있었지만 이제는 대부분 체념하는 분위기다.

그래도 버티지 못하면 길은 하나, 폐업이다.

부동산써브에 따르면 2006년 1분기부터 2012년 3분기까지 전국 공인중개사 현황을 분석한 결과 한때 5만7000명이 넘었던 수도권 공인중개사 수는 5만1642명으로 2006년 4분기 수준으로 줄었다. 2008년 3분기보다 9.4% 감소한 셈. 월평균 400명을 웃돌던 신규 공인중개사 수도 지난해는 344명으로 18.5%나 쪼그라들었다.

1992년 공인중개사무소를 시작했던 최 지회장은 외환위기 때가 차라리 그립다고 했다. “경기는 나빴지만 명예퇴직으로 집을 내놓는 사람도 많았고, 가격이 싸니까 부동산 쪽에선 거래가 활발했죠.” 경기 안양시에서 10년, 강남에서만 10년 영업한 베테랑인 그도 지난해 매매 건수를 묻자 입을 다물었다.

○ 공인중개사 학원가도 ‘찬바람’

한때 ‘국민 자격증’이었던 공인중개사 자격시험 응시자도 계속 줄어들고 있다. 한국산업인력공단에 따르면 2009년 15만5024명(2차 접수 기준)이던 접수자는 2011년 8만6179명으로 10만 명 선 아래로 떨어졌고 지난해는 7만1067명으로 반 이하로 줄었다. 방학을 맞아 자격증을 따려는 학생들로 붐비던 학원가에는 찬바람만 감돈다. 종로구의 A학원 관계자는 “수강생들로 넘쳐났던 학원이 썰렁한 것을 보면서 부동산 불황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공인중개사 시험의 문턱이 낮아 ‘위기’가 찾아왔다는 비판도 나온다. 실제로 1997년 외환위기 후 실업자가 넘쳐나던 시절, 공인중개사 시험에 응시자가 몰려들면서 연간 1만 명 이상의 합격자가 쏟아져 나왔다. 2005년 15회 추가시험에서는 무려 3만 명 이상의 합격자가 나오기도 했다. 시장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자격증만 남발하니 부동산 경기가 꺾이자 대거 ‘자연도태’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정태희 부동산써브 부동산연구팀장은 “마땅한 창업 계획이나 자본이 없는 이들이 공인중개사 쪽으로 몰려들다 보니 부동산중개 업계가 포화 상태”라며 “시장 상황을 봐가며 합격자 수를 조정하는 식으로 공인중개사 시험을 선진화할 필요가 있다”고 꼬집었다.

장윤정 기자 yunjung@donga.com
#강남#공인중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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