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락장에 개미는 주식 살 준비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8월 16일 16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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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시장이 공포에 질렸던 5일. 강승호(46·개인사업) 씨는 정기예금 만료 후 보통예금에 넣어뒀던 2500만 원을 증권계좌로 옮겼다. 실적은 괜찮은데 증시에 퍼진 공포감 때문에 주가가 갑자기 내린 종목의 주식을 사기 위해서였다.

미국의 더블딥(경기 재침체) 우려가 부각되며 증시가 폭락하기 시작한 이달 초, 한국의 개인 투자자 중 상당수가 은행에서 자금 빼 주식 매수를 준비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외국인이 2일부터 9일 연속 5조 원어치 이상의 주식을 팔 때 개인들이 2조 원 규모의 주식을 순매수했던 배경에는 이런 움직임이 있었다.

●개인들, 주가 폭락할 때 움직였다

15일 한국은행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11일 기준 민간은행의 보통예금과 당좌예금을 합친 요구불예금은 77조 원으로 지난달 말보다 3조 원 가량 감소했다. 반면 주식 매수에 앞서 증권계좌에 넣어두는 예탁금 규모는 7월 말 17조 원에서 이달 11일 22조 원으로 5조원이 늘었다.

요구불예금 같은 단기자금이 이동하는 주요 경로인 자산관리계좌나 머니마켓펀드의 잔액에 거의 변화가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은행에서 빠져나온 자금이 주식 매수자금으로 유입됐을 가능성이 높다. 또 일부 투자자가 폭락장에서 주식을 일단 판 뒤 증시에서 발을 빼지 않고 증권계좌에 자금을 묻어두면서 예탁금 규모가 불어나기도 했다. 금융계는 개인이 현금 형태로 보관하고 있는 이른바 '장롱예금'과 수시입출금식예금도 주가 폭락 때 증시로 흘러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현상은 개인들이 3년 전 리먼브러더스 파산 때 한국 증시가 곤두박질쳤지만 결국 정상궤도로 되찾은 기억을 떠올려 공격적인 투자에 나섰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예컨대 증시 폭락의 기미를 눈치 채기 힘들었던 1일, 박지연(38·서울 마포) 씨는 남편 명의의 보장성보험 중 하나가 같은 질병을 보장하는 것이어서 비효율적이라는 설계사의 말을 듣고 8년 간 불입했던 보험을 해지했다. 중도해지 수수료를 내고 남은 500만 원으로 적립식 펀드에 가입했다. 주가가 더 떨어진 9일 박씨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너무 떨어진 것 같다"며 펀드에 100만 원을 더 넣었다.

●외국 투자자보다 용감한 한국의 개미들

이런 한국 개인투자자들의 행보는 공포에 질려 안전자산만 찾아다니는 외국 투자자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세계 펀드자금의 흐름을 추적하는 이머징 포트폴리오 펀드 리서치(EPFR)에 따르면 시장이 불안했던 4~10일(한국 시간) 세계 각국의 펀드 환매액은 161억 달러로 2008년 2월 이후 가장 많았다. 이 펀드 환매금액은 금리가 낮지만 손실을 볼 위험이 적은 머니마켓펀드(MMF)로 흘러갔다.

반면 현재 한국의 주식형 펀드 설정액은 미국 발 위기라는 악재가 증시에 본격적으로 반영되기 전인 7월말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해외에서 대표적 안전자산으로 통하는 MMF에 들어온 자금은 11일 기준 52조 원으로 7월 말보다 오히려 1조 원 안팎 줄었다.

주가 급락을 투자의 기회로 활용하려는 분위기는 고액 자산가들이 많이 찾는 은행 프라이빗뱅킹(PB) 분야에서도 감지된다. 일부 PB 고객들은 주가지수가 4% 가까이 하락한 8일과 9일 집중적으로 주식형 펀드를 매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재혁 외환은행 PB팀장은 "외환보유액이 늘고 기업실적이 좋은 상황에서 주가가 급락한 것은 심리적 요인이 크다고 판단해 이른바 '저가 매수'에 나서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 개인들의 이런 과감한 투자가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각국의 재정 부실 때문에 촉발된 현 상황은 몇몇 은행의 부실이 원인이 됐던 2008년 금융위기보다 파장이 광범위하고 장기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인형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투자에서 고수익을 내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하긴 하지만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경우 교역조건이 악화되고 수입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함께 감안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홍수용기자 legman@donga.com
하정민기자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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