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과의 기싸움 이기려 세종문화회관 건립”

  • 입력 2009년 8월 28일 03시 00분


“잘난 것 없는 내가 믿을 것이라고는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 올해 미수(米壽)를 맞은 박승복 샘표식품 회장이 다음 달 5일 자서전을 펴낸다. 그의 뒤편으로 부친인 박규회 샘표식품 창업자의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 제공 샘표식품
“잘난 것 없는 내가 믿을 것이라고는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 올해 미수(米壽)를 맞은 박승복 샘표식품 회장이 다음 달 5일 자서전을 펴낸다. 그의 뒤편으로 부친인 박규회 샘표식품 창업자의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 제공 샘표식품
88세 미수 맞은 샘표 박승복 회장 내달 자서전 출간
은행원-공무원 거쳐 기업가로 “남 안하는걸 했으니 난 괴짜”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인 세종문화회관은 북한과의 ‘기 싸움’ 때문에 만들어졌어요. 북한이 자꾸 ‘1만 명이 모여 정치회담 하자’며 약을 올렸는데 남한엔 그만한 인원을 수용할 건물이 없었거든요.”

박승복 샘표식품 회장이 1960년대를 떠올리며 말했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현 세종문화회관 자리에는 당시만 해도 1000여 명만 수용할 수 있는 시민회관이 있었다. 1974년 당시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이었던 박 회장은 김종필 총리와 5000명이라도 들어가는 건물을 짓자는 데 뜻을 모아 세종문화회관을 착공하게 되었다. 지금으로선 다소 유치해 보이는 남북한 간 경쟁이지만 그는 “세종문화회관을 지은 이후 북한이 잠잠해졌다”고 말했다.

올해 미수(米壽·88세)인 박 회장이 다음 달 5일 자서전 ‘장수경영의 지혜’(청림출판사)를 펴낸다. 그는 이 자서전에 은행원, 공무원, 기업가로 직업을 세 번 바꿔 살았던 경험을 녹였다. 박 회장은 함흥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 한국식산은행(현 한국산업은행)에 들어가 25년간 은행원으로 지냈다.

1965년 은행 상사가 재무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기며 그를 함께 데려가 뜻하지 않게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재무부 기획관리실장, 초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을 지내며 10여 년간 정일권, 백두진, 김종필 총리를 보좌했다. 공무원에서 샘표식품 최고경영자(CEO)로 다시 변신한 것은 부친인 박규회 샘표식품 창업자가 별세한 1976년, 박 회장이 54세 때였다.

박 회장은 “국무총리를 보좌하면서 나랏일을 맡았던 10년이 몸은 가장 고됐지만 마음은 최고로 행복했던 시기”라고 회상했다.

“내가 공무원치곤 괴짜였지.” 박 회장이 웃으며 말했다. 왜 그런지 묻자 “남들이 안 하는 걸 했으니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1960년대 한국은 혼돈의 시기였다. 뭐든 새로 시작해야 하던 때다. 당시에 벌였던 많은 사업 중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세종문화회관 건립과 주민등록번호제 도입, 한국 최초의 해외 홍보책자를 만든 일 등이다. 홍보 책자도 어떻게 보면 북한과의 경쟁에서 지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만들었다. 일본 교포 사회를 방문했는데 방문하는 곳마다 북한에서 발행한 월간지만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최고급 종이와 잉크를 써 1961∼1975년 한국의 발전상을 소개하기로 했다. 책 제목은 ‘금일의 한국(今日の韓國)’.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 스페인어 아랍어 등으로 찍어냈다.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간장파동’ 때였다고 한다. 그는 “진실이 통하지 않아 외로운 싸움을 벌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간장파동은 1985년 8월 무허가 간장 제조업자들이 소금물에 검은 색소를 타서 팔다 구속된 사건이다. 간장 생산방식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유해성 시비에 샘표도 휘말렸다. 박 회장은 이례적으로 직접 TV광고에 나와 결백을 주장했고, 공장을 모두 공개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박 회장은 스스로를 ‘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가진 능력보다 더 많은 성과를 거뒀다고 생각하기 때문.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지만 기회도 많았던 것에 대한 겸손으로 보였다.

김현지 기자 nu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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