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남자의 화장본능 “메이크업은 내 운명”

  • 입력 2009년 5월 20일 02시 57분


■ 메이크업 아티스트 박태윤 - 손대식 씨 성공 스토리

고교 때부터 단짝 36세 동갑
작년 8월 ‘셉’ 브랜드 만들어
홈쇼핑에서만 160억원 매출

1988년 광주의 한 유원지에서 중등 미술 사생대회가 열렸다. 고수(高手)는 고수끼리 알아본다고, 당시 서로 다른 학교에 다니던 박태윤 군과 손대식 군은 서로를 눈여겨봤다. 그때 박 군은 그룹 소방차가 유행시킨 바가지 머리에 양쪽 운동화 끈을 빨강과 초록으로 각기 다르게 묶고 있었다. 손 군은 ‘의상실 집 아들’답게 일본 ‘맨즈 논노’ 잡지에 나오는 이탈리아 신사풍 재킷을 입었다. 이 대회에서 나란히 동상을 받은 둘은 이듬해 광주예술고 회화과에서 다시 만나 3년 내내 단짝 친구로 지냈다. 성인이 돼서 나란히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된 두 사람은 지난해 8월 ‘셉(SEP)’이란 화장품 브랜드를 만들어 지금까지 CJ오쇼핑을 통해 16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 ‘튀어서 성공한’ 남자 듀오 메이크업 아티스트

15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 CJ오쇼핑 사옥에서 만난 박 씨는 양배추 모양의 파마와 나비넥타이, 손 씨는 검은색 ‘닥터 마틴’ 운동화 차림으로 명랑만화 캐릭터 같았다. 어려서부터 얼굴에 ‘코티’분을 찍어 바르다 엄마한테 혼났다는 손 씨는 자신이 만든 에센스 파운데이션으로 피부 톤을 열심히 정리했다.

중산층 가정에서 교복을 디스코 바지로 ‘개조’해서 입던 이들에게 드라마틱한 역경은 없었다. 그저 하고 싶은 일(그림)을 하다 메이크업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고 한다. 시대 운도 있었다. 국내에 패션 잡지 붐이 일었던 2000년대 초반, 당시로선 드물던 ‘남자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화보 촬영 메이크업을 맡았다. 패션업계는 여성스러운 말투와 독특한 ‘고교 단짝 친구 남자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상품성에 큰 관심을 보여 둘은 자신들의 상품성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새로운 패션 트렌드를 몸에 걸치면서 부단히 메이크업 트렌드를 연구해 박 씨는 ‘스틸라’와 ‘라네즈’, 손 씨는 ‘부르조아’의 수석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지냈다. 피부 표현에 공들이고 속눈썹을 강조하는 이들의 메이크업은 ‘럭셔리 메이크업’으로 통하게 됐다. 손 씨는 요즘 1회에 300만 원을 받고 메이크업을 해 준다. 박 씨는 연간 5억 원 정도를 벌며 대전 우송대 뷰티 디자인학과 초빙교수도 맡고 있다.

○ ‘소비자를 편리하게 하라’

국내 화장품업체 ‘엔프라니’는 지난해 ‘아티스트 메이크업 브랜드’를 내기 위해 적당한 인물을 물색하다 두 사람을 발견했다. 이들이 강조하는 ‘연두부 같은 피부’가 요즘 트렌드와 딱 맞아떨어진 데다 ‘남성 듀오’란 콘셉트가 큰 차별화 요소였다. 몇 년 전부터 자신들의 브랜드를 내고 싶어 한 이들은 “엔프라니가 화장품 개발을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겨 승낙했다”며 “어떻게 하면 소비자들이 빠르고 편리하게 화장하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고 말했다.

브랜드 콘셉트를 ‘심플(Simple)’ ‘이지(Easy)’ ‘퍼펙트(Perfect)’로 삼고 이 세 단어의 첫 글자를 따서 ‘셉(SEP)’이란 이름을 만들어냈다. 아이섀도는 크레파스처럼 쓱쓱 문지르면 되고, 마스카라는 속눈썹을 쉽게 올릴 수 있도록 반달 모양으로 만들었다. 결과는 대성공. 이들은 국내 기존 홈쇼핑 시장의 고객층(30대 이상)을 20대까지 끌어내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허물없는 통화를 하면서 메이크업 얘기를 하는 이들은 장벽 없는 커뮤니케이션과 변화를 읽어내는 소비자 지향적 마인드로 ‘히트 상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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