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 영업장엔 아마 이런 풍경도? “고위험 감수합니다”

  • 입력 2009년 1월 8일 02시 58분


내달 자본시장통합법 시행투자성향 분류 적합한 상품만 판매… 모험 고집하는 고객은 확인서 내야

《두 달 뒤인 3월, 남편의 퇴직금으로 생활비를 충당하는 주부 A(55) 씨는 ‘주식형펀드로 퇴직금을 불려보자’는 생각에 증권사 영업점을 찾는다. 증권사 직원은 A 씨에게 “자본시장통합법(자통법)이 시행돼 펀드 가입 전 투자자 정보 확인서를 작성해야 한다”며 설문지를 건넨다. A 씨가 답한 내용을 검토한 직원은 “투자 성향이 ‘위험중립형’이라 혼합형펀드나 채권형펀드가 적합하겠다”고 권유한다. 높은 수익률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A 씨는 그래도 여전히 주식형펀드를 고집한다. 그러자 직원은 A 씨에게 한 장의 ‘확인서’를 건넨다. 확인서엔 ‘본인의 투자자 유형보다 위험도가 높은 상품을 선택했습니다. 이 투자는 본인의 판단에 의한 것으로 모든 위험을 감수할 것임을 확인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다음 달 4일 자통법이 시행되면 금융회사 영업점에서 이런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상품분류 기준 이달중 최종 확정

동아일보 경제부 취재팀이 7일 입수한 한국증권업협회 및 자산운용협회의 ‘표준투자권유준칙’ 가안(假案)에 따르면 성장형 주식펀드, 파생상품 투자펀드, 주식워런트증권(ELW), 일부 원금 비보장형 주가연계증권(ELS) 등은 가장 위험도가 높은 상품으로 분류돼 투자가 크게 제한될 것으로 전망된다.

앞으로 금융회사는 고객의 투자 성향과 금융상품의 위험도를 5단계로 분류해 투자 성향에 맞는 상품만 권유할 수 있다. 각 위험도에 따른 세부적인 금융상품 분류기준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두 협회는 이 가안을 좀 더 손질한 뒤 이달 중 최종안을 확정해 자통법 시행에 맞춰 적용한다는 계획이다.

○ 성장형 펀드, 아무한테나 추천 못 한다

앞으로 투자자는 금융상품에 가입하기 전에 ‘투자자 정보 확인서’를 써야 한다.

확인서에는 “감내할 수 있는 원금 손실은 어느 정도입니까” “금융상품 투자 지식이 어느 수준입니까” 등 7가지 객관식 질문이 적혀 있다. 과거 금융회사 직원이 고객에게 구두로 묻거나 아예 묻지도 않았던 투자 성향을 체계적으로 확인하는 절차다.

답변 결과는 점수로 집계되며 이에 따라 고객의 투자 성향은 △안정형 △안정추구형 △위험중립형 △적극투자형 △공격투자형 등 5단계로 나뉜다.

예를 들어 61세 이상으로 투자 손실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고 일정한 수입이 없는 데다 금융지식까지 적다고 답했다면 ‘안정형’으로 분류된다. 또 20∼40세의 투자자로 기대수익이 높으면 위험이 커도 상관이 없고, 수입이 일정하며 금융지식이 많다고 답한 투자자는 ‘공격투자형’이다.



금융상품도 투자위험에 따라 △무위험 △저위험 △중위험 △고위험 △초고위험 상품으로 나뉜다. 금융회사는 안정형 투자자에게는 무위험 상품만, 안정추구형 투자자에게는 무위험과 저위험 상품을 권할 수 있다. 초고위험 상품은 공격투자형 투자자에게만 추천이 가능하다.

가안에 따르면 성장형 주식펀드, 선물옵션상품 및 일부 투기등급(BB 이하) 채권 등은 초고위험 상품으로 분류된다. 가치주펀드와 주식형 인덱스펀드는 고위험 상품에, 혼합형펀드는 중위험 상품에 들어간다. 채권형펀드와 원금보장형 ELS는 저위험 상품으로 분류되고 국고채 통안채 머니마켓펀드(MMF)는 무위험 상품이다.

물론 투자자가 이 같은 권유를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본인의 투자 성향보다 위험도가 높은 상품에 투자하고 싶다면 ‘이에 따르는 위험을 감수한다’는 내용의 확인서에 반드시 서명해야 한다.

금융사 판매직원의 설명 의무도 한층 강화된다. 가안에는 최대 손실 가능 금액, 투자지역의 경제 상황, 환율의 위험성 등 금융회사가 고객에게 설명해야 하는 사항이 일일이 명시돼 있다. 각 금융회사가 표준투자권유준칙을 참고해 회사별 실정에 맞는 준칙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지만 자통법 시행 초기에는 대부분 협회 차원의 준칙을 따를 것으로 보인다.

○ 펀드 가입에 1시간 걸릴 것

금융상품 투자에 필요한 절차가 늘어나면서 과거 15분 남짓 걸렸던 펀드 가입시간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기자가 직접 증권사 직원의 설명을 들으며 각종 서식을 작성하는 데만 한 시간가량이 소요됐다. 한 증권사의 상품개발 담당자는 “갑자기 까다로워진 절차에 항의하는 투자자가 많을까 우려된다”며 “한국 고객들은 성미가 급해 모든 절차를 생략한 채 곧바로 자기가 원하는 투자상품을 선택하려고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금융권에서는 전체 고객의 절반 이상이 5단계의 투자 성향 가운데 ‘적극투자형’과 ‘위험중립형’으로 분류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만큼 2007년 상승장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상승형펀드와 원금 비보장형 ELS 등을 추천할 수 있는 고객이 줄어 관련 상품의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지연 기자 chance@donga.com

이서현 기자 baltika7@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