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러기 아빠 “송금 괴로워”…장롱달러 보유자 “환전 즐거워”

입력 2008년 10월 9일 19시 35분

아내는 일부러 밝은 척하는 것 같았다.

"애들은 잘 지내. 나도 오랜만에 강의실에 앉아보니 너무 재밌고…."

2년 째 '기러기 아빠' 신세인 최태준(48·서울 서초구 방배동) 씨. 지난 주말 캐나다 토론토에서 유학 중인 아내와 인터넷 화상전화를 했다. '환율이 너무 뛰니 큰 아이가 대학 가는 내년엔 귀국하라'는 말을 하고팠지만 결국 못했다.

아내도 안다. '원-달러 환율이 1400원대에 이르렀으니 생활비 보내기가 얼마나 힘들까. 이제 귀국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달러 환율 급등(원화가치 급락)은 기업이나 금융기관은 물론 국민들의 일상생활까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과거 환율 상승 때는 달러 소비량을 약간 줄이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유학을 중단하려는 등 소비 패턴 자체를 바꾸는 분위기다.

●기러기 아빠와 유학생 '수난시대'

재작년 미국에 교환교수로 나갔던 김모 교수는 지난해 아내와 자녀를 현지에 두고 혼자 귀국했다. 처음엔 외로운 게 문제였지만 지금은 자금난이 더 큰 문제다.

그는 "매달 3500~4000달러를 송금해왔는데 이번 달에는 80만 원 정도 더 들었다"며 "한꺼번에 환전을 해 둘 목돈이 없으니 매일 치솟는 환율이 무섭다"고 말했다.

유학생의 한숨도 깊어지고 있다.

영국에서 비정부기구 인턴으로 일하면서 대학원을 준비하는 박세연(28) 씨. 그는 "한국에서 보내주시는 생활비는 100만 원 정도로 고정돼 있는데 최근 체감 물가는 2배가량 뛰었다"며 "대학생들도 아르바이트를 구하느라 비상이고 교재를 제 때 사지 못하는 친구들도 있다"고 말했다.

자녀를 조기 유학 보냈던 부모들은 중도 포기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을 대상으로 조기유학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D유학원에는 최근 귀국 시점을 상담하는 고객 문의가 하루 2,3건 씩 들어온다. 2~3년 과정으로 미국이나 필리핀으로 자녀를 유학 보낸 학부모 중 체류 기간이 1년 정도 사람들이 자녀를 불러들이려는 사례가 많다.

●개인 자금운용에 큰 차질

회사원 정모(26) 씨는 지난달 12일 자동차를 사면서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생이 대학에서 받은 장학금 6000달러를 빌렸다. 당시 원-달러 환율은 1100원 선으로 660만 원을 빌린 셈이었지만 지금 환율로는 800만 원이 넘는다.

정씨는 "동생에게서 잠시 돈을 빌렸다가 이달 말 만기가 돌아오는 적금으로 갚으려 했는데 환율 급등으로 적금을 중간에 깨느니만 못하게 됐다"며 안타까워했다.

회사원 손모(31) 씨는 작년 말부터 계획했던 뉴욕 여행을 연기해야 할 판. 이달 말 뉴욕에서 가까운 필라델피아에서 유학 중인 남자 친구를 만나러 갈 꿈에 부풀어 있었지만 예산이 70만~80만 원 정도 늘어나 고민이다.

가을 패키지 여행도 쉽지 않다. 여행사들이 환율 급등을 이유로 여행비를 대폭 높이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때문. 모두투어는 22일 출발하는 여행상품부터 환율 상승분을 감안해 비용을 추가 징수하기로 했다.

●'장롱 달러' 등장

집에 달러를 갖고 있거나 달러 표시 금융상품에 가입했던 이들은 요즘 '표정관리' 중이다.

국내외를 오가며 사업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던 달러 뭉치나 해외여행을 한 뒤 장롱 속에 넣어둔 소액의 달러를 환전해 차익을 올린다.

우리은행 정병민 테헤란로 PB팀장은 "하루 5, 6건 씩 환전을 하는데 많게는 50만 달러 이상을 원화로 바꿔가는 사람도 있다"고 귀띔했다.

최근 외화보험에 가입했던 사람들 중 일부가 보험을 해약하는 사례도 많다. 보통 중도 해약하면 원금 손실을 보기 마련이지만 환율이 워낙 많이 올라 높은 수익을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