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세상, 단순하게 깎고 다듬어라

  • 입력 2008년 5월 13일 02시 59분


《현대카드는 이달부터 고객에게 발송하는 신용카드 결제대금 청구서를 액수와 포인트가 큼지막하게 쓰인 방식으로 바꿨다. 기존 청구서는 깨알같이 작은 글씨의 광고나 이벤트 공지가 많아 고객들이 “그래서 도대체 결제대금이 얼마인데?”라는 식의 짜증을 내는 데 따른 것이다. 청구서를 통한 광고는 효과가 그다지 크지 않고 오히려 ‘정보 공해(公害)’가 된다는 판단도 한몫했다.정상호 현대카드 브랜드관리실장은 “청구서는 청구서답게 결제대금을 알려야 한다는 기본에 충실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기술의 발달로 제품이 복잡해지고 정보가 홍수처럼 밀려드는 가운데 제품이나 서비스에 ‘기능 다이어트’를 하려는 열풍이 불고 있다. 》

경기도청에 민원 전화를 걸면 상담원이 곧장 전화를 받는다. 기계음에 가까운 전자 목소리가 민원인에게 ‘주민번호를 입력해라, ○○ 번호를 누른 뒤 우물 정(#)자를 눌러라’ 등의 ‘지시’를 하는 여느 자동응답시스템(ARS)과는 다르다.

경기도 총무과 측은 “전자 목소리에 집중하고 여러 번 전화 버튼을 눌러야 하는 데 따른 스트레스를 막기 위한 것”이라며 “시스템을 바꾼 뒤 ‘공무원들이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는 항의성 전화가 없어졌다”고 전했다.

다국적기업인 필립스는 브랜드 모토를 아예 ‘센스 앤드 심플리시티(감각과 단순)’로 내걸었다. 소비자들의 감각에 따른 단순함이 기술 발전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박선영 필립스 소비자 라이프스타일 부문 과장은 “디지털 혁명이 소비자의 삶을 더 편리하게 해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혼란과 좌절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필립스가 세계 8개국 소비자 165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소비자가 제품 작동법을 파악하지 못해 반품하는 가전제품이 전체의 30%가량 되는 것으로 파악됐다.

필립스의 ‘단순주의’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제품은 면도기 ‘아키텍’. 둥그런 머리 부분이 360도로 움직이며 턱과 목 등 굴곡이 심한 부분까지 면도가 가능해 국내 시장을 49%(3월 현재) 점유하고 있다.

최근 ‘부장 싫으면 피하면 되고, 못 참겠으면 그만두면 되고…’라는 SK텔레콤의 광고음악 ‘되고송’도 비슷하다. 이 노래 가사는 ‘∼∼∼하면, ∼∼∼하고’로 단순해 상황에 맞게 가사를 꿰어 맞춘 ‘군인 버전’, ‘노처녀 버전’, ‘재수생 버전’ 등 다양한 패러디가 쏟아지고 있다.

SK텔레콤 측은 고객들이 홈페이지에서 이 노래를 하루 평균 400∼500건 내려받아 다른 노래(100∼200건)보다 반응이 훨씬 좋다고 말했다.

LG전자의 ‘와인폰’은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이나 MP3 없이 액정화면과 버튼을 크게 하는 등 통화 기능에 충실하게 만들어졌다. 하루 1000여 건씩 개통될 정도다.

이동훈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최근 서비스와 제품이 단순화되는 현상은 공급자가 아닌 소비자 위주로 사고가 바뀌고 있다는 증거”라며 “과잉된 컨버전스(융합)는 소비자들에게 정보나 기능에 대한 피로감 같은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유영 기자 ab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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