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FTA 시위…뼛조각 쇠고기… ‘가시밭 위의 424일’

  • 입력 2007년 4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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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의 주역들. 왼쪽부터 김종훈 한국 측 수석대표, 김현종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웬디 커틀러 미국 측 수석대표, 카란 바티아 미 무역대표부(USTR) 부대표. 김재명 기자·동아일보 자료 사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의 주역들. 왼쪽부터 김종훈 한국 측 수석대표, 김현종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웬디 커틀러 미국 측 수석대표, 카란 바티아 미 무역대표부(USTR) 부대표. 김재명 기자·동아일보 자료 사진
■ 힘겨웠던 협상 과정

지난해 2월 3일(한국 시간) 김현종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과 로버트 포트먼 전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미 의회에서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시작을 공식 선언하면서 돛을 올린 한미 FTA 협상 여정은 말 그대로 ‘가시밭길’이었다.

공식 협상만 8차례. 양국은 지난해 6월 5일 1차 협상을 시작으로 10개월 동안 워싱턴과 서울, 시애틀과 제주를 오가며 줄다리기를 거듭했다.

그러나 지난달 31일 오전 7시였던 당초 협상 마감 시한까지도 쇠고기 자동차 섬유 등 핵심 쟁점에 대한 견해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양국은 2일 오전 1시, 다시 그 이후로 시한을 연장했지만 팽팽한 힘겨루기는 2일 새벽까지도 쉽게 끝나지 않았다.

○ 엎치락뒤치락, 급박한 막판 협상

한미 양국은 협상을 거듭하면서 덜 민감한 사안은 ‘가지치기’를 해 나갔지만 민감한 사안에서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서울 8차협상(3월 8∼12일)에서도 결론을 내지 못했던 양국은 잇단 고위급 협상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진전 없이 26일부터 최종라운드인 통상장관급 회담에 들어갔다. 이 회담 역시 ‘뼈 있는 쇠고기’까지 수입하라는 등의 미국 측 요구로 발목이 잡혔다.

지지부진했던 협상은 지난달 29일 일단 중요한 전기를 맞았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중동을 순방하던 노무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협상 타결에 대한 정치적 의지를 재확인하면서였다.

노 대통령은 30일 귀국하자마자 청와대에서 권오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김현종 본부장에게서 협상 진행 상황을 보고받고 협상카드를 조율했다.

하지만 미국 의회가 행정부에 부여한 무역촉진권한(TPA)에 따른 당초 타결 시한인 31일 오전 7시까지도 주요 현안이 합의되지 않자 ‘협상 결렬’ 가능성이 대두되기도 했다.

오전 7시 40분 김종훈 한미 FTA 한국 측 수석대표가 “당초 예정됐던 협상시한을 2일 오전 1시까지 연장해 추가 협상을 하기로 했다”고 발표하면서 협상은 다시 이어졌지만 양측의 ‘벼랑 끝 버티기’는 계속됐다.

○ 현 정부 들어 협상 본격화

한미 FTA는 출발부터 험난했다.

실패한 전례도 있었다. 김대중 정부는 1998년 6월 미국과 좁은 의미의 FTA로 볼 수 있는 투자협정(BIT) 협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스크린쿼터(한국영화 의무 상영일수 규정) 폐지 등을 둘러싸고 지루한 공방을 이어 가다 2000년 5월 중단했다.

그 후 한동안 한미 FTA의 추진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변화의 조짐은 2005년 11월 부산에서 열린 제13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중 노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이 경북 경주시에서 정상회담을 할 때 감지됐다. 양국 정상은 당시 “한미 경제 협력을 강화한다”는 내용의 공동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어 노 대통령은 지난해 1월 18일 신년연설에서 “우리 경제의 미래를 위해 미국과도 FTA를 맺어야 한다”며 “조율이 되는 대로 협상을 시작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정부는 곧바로 한미 FTA 선결 과제로 꼽히던 스크린쿼터 축소(연간 146일→73일)와 미국산 소의 뼈 없는 살코기 수입 재개를 발표해 분위기를 조성한 뒤 2월 3일 한미 FTA 협상 개시를 공식 선언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영화인과 농민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닥쳤고 협상 개시 선언 전에 열린 공청회는 파행을 면치 못했다.

○ 험난했던 협상 여정

예상대로 협상 과정은 험난했다. 한미 양국은 ‘탐색전’에 그쳤던 1차협상부터 농업 섬유 등에서 통합협정문 마련에 실패했다. 양국 간의 치열한 힘겨루기가 계속돼 협상 때마다 어느 한쪽이 협상장을 박차고 나오는 사태가 이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국 협상단이 국회 한미 FTA특별위원회에 보고했던 협상전략 문건이 유출되는 사고까지 일어났다.

국내에서는 협상 때마다 한미 FTA에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가 이어졌고 협상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김근태, 천정배 의원 등 범(汎)여권 인사들까지 협상 반대 단식농성에 나섰다.

미국 의회도 쇠고기, 자동차 등에서 한국 측 양보를 얻어내야 한다며 부시 행정부를 강하게 압박하고 나서는 등 협상 안팎의 여건은 계속 악화됐다.

하지만 협상 결렬이 가져올 정치적 부담을 고려한 듯 양국 정부는 ‘연장전’까지 벌이며 최종 시한까지 협상을 추진했다.

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 협상 주역들

김종훈-커틀러 ‘미운정 고운정’

김현종-바티아 ‘묘한 동문인연’

막판까지 피를 말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은 지난해 6월 5일 미국 워싱턴 1차 협상을 시작으로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마라톤 식으로 진행됐다. ‘제2의 개항(開港)’으로 불리며 국민적 관심을 모은 만큼 양국 핵심 관계자들은 내내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왔다.

한국의 김종훈 수석대표, 미국의 웬디 커틀러 수석대표는 협상실무를 주도한 ‘FTA 커플’.

날카로운 인상의 김 대표는 종종 자신을 글래디에이터(gladiator·검투사)로 표현했다. 협상에서 ‘이기지 못하면 죽는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비공식 석상에서는 자신과 함께 협상의 끝자락에 선 커틀러 대표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을 나누는 등 부드러운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제주에서 열린 4차 협상에서는 커틀러 대표와 협상장 인근 녹차박물관을 산책하는 장면도 목격됐다.

외무고시 8회인 김 대표는 주미(駐美) 샌프란시스코 총영사 등을 거쳐 2004년 부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고위관리회의 의장을 맡으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커틀러 대표는 조지타운대 석사과정을 마치고 미 상무부를 거쳐 1988년부터 미 무역대표부(USTR)에서 근무해 온 통상 베테랑.

USTR 일본·한국·APEC 담당 대표보인 그는 지난해 7월 서울 2차 협상에서 돌연 전체 실무 협상을 보이콧할 정도로 강공 드라이브를 구사하면서도 종종 온화한 미소로 냉랭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지난해 12월 몬태나에서 열린 5차 협상 때는 첫딸의 출산을 지켜보지 못하고 미국으로 건너온 외교통상부 권혁우 사무관에게 “‘코러스(KORUS·한국과 미국을 붙여 줄인 말) 베이비’의 출산을 축하한다”며 위로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지난달 26일부터 진행된 통상장관급 회담에서는 그동안 막후에서 ‘컨트롤타워’ 역할을 했던 한국의 김현종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과 카란 바티아 USTR 부대표가 전면에 나섰다.

두 사람은 미 컬럼비아대 로스쿨 동문으로 오랫동안 변호사로 일한 공통점이 있다.

김 본부장은 미국의 로펌에서 일하다 1995년 외교부 자문 변호사를 맡으며 정부와 인연을 맺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 통상현안을 보고하면서 눈에 띄어 2003년 5월 통상교섭조정관(1급)을 거쳐 2004년 7월부터 장관급인 본부장을 맡고 있다.

인도계 미국인으로는 미 행정부 내 최고위직인 바티아 부대표는 비교적 합리적인 성향의 통상 전문가로 오래전부터 최종 협상을 주도할 인물로 꼽혀 왔다. 수전 슈워브 USTR 대표보다 미국 내 영향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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