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황인학]적대적 M&A앞에 벌거벗은 한국기업

  • 입력 2007년 3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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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 국내 대표적 기간산업체의 경영권에 대한 외국 자본의 탐색 소문이 나돌고 있는 요즘, 이 성어처럼 국내 경영권 시장의 과거와 현재를 잘 표현하는 말은 없을 듯하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경영권을 적절히 견제하고 규율할 수단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지금은 외국계 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M&A) 등 경영권 위협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걱정이다. 경영권 위협은 범람하지만 대응책 마련은 정부 정책에 묶여 쉽지 않다. 이 때문에 기업은 많은 이익을 내고도 일자리 창출과 성장잠재력 확충에 절실히 필요한 투자를 꺼리고 외국계 주주의 단기적인 이익 실현 목적에 휘둘린다.

헤지펀드 ‘먹튀’ 시작에 불과

경영권 공격자에게 날개를 달아 주고 방어자의 발을 묶다 보니 외국계 자본의 ‘먹튀’ 행태가 속출한다. 아시아지역 전문투자 헤지펀드였던 타이거펀드는 1999년 SK텔레콤의 지분 6.6%를 매입해 경영권을 위협하다 6300억 원의 차익을 보고 떠났다. SK㈜ 주식을 14.99% 매입해 같은 방법으로 2년여 만에 8000억 원의 수익을 남긴 소버린자산운용(2003년), 삼성물산 주식으로 단기간에 100억 원을 번 헤르메스(2004년)도 대표적이다.

이때까지는 국부(國富) 유출 문제와 제도상의 결함보다는 국내 재벌 지배구조의 취약성을 탓하는 지적이 많았다. 그러나 작년 말 KT&G의 경영권을 위협하다 1년여 만에 1500억 원의 차익을 내고 떠난 칼 아이칸의 경우에서 보듯 재벌이라서, 기업지배구조가 취약해서 외국계 ‘먹튀’ 자본에 당하는 게 아니다. KT&G는 민영화 기업으로 재벌과 달리 지배주주가 없고 한국증권선물거래소에 의해 ‘기업지배구조 최우수 기업’으로 연속 선정된 기업이다.

경영권 위협의 범람과 그로 인한 부작용은 개별 기업의 소유 지배구조보다는 제도의 결함에 많은 원인이 있다. 외환위기 이전 정부는 기업 공개와 소유 분산을 유도하기 위해 경영권을 정책적으로 보장했다.

외환위기 이후에는 적대적 M&A를 완전 개방한 반면 기존 경영진 신분 보장, 거액의 퇴직금 지급 등의 방법으로 인수 후 불이익을 크게 만들어 인수 포기를 유도하는 포이즌 필(poison pills)과 차등의결권 주식발행 등 미국에서 널리 인정되는 방어수단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것이 문제의 단초였다. 공격의 길을 열어 줬으면 방어를 허용해야 하는데 우리는 미국 제도의 반쪽만 모방했다. 그렇기 때문에 국내 기업이 외국계 자본의 쉬운 M&A 사냥감이 되는 상황이 초래됐다.

경영권 방어제도 도입 시급

더 늦기 전에 경영권 방어제도를 보완해야 한다. 국제 투기자본 및 글로벌 사모펀드의 경영권 위협은 시작에 불과하다. 한국 기업은 적은 돈을 가지고 경영권 공격이 가능하다. M&A에 성공하지 못해도 막대한 단기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반복 학습했으니 이 같은 ‘저위험 고수익’ 전략을 누가 따르지 않겠는가. SK텔레콤, SK㈜, KT&G가 그랬듯이 삼성전자, 포스코 등 국내 다른 대표기업과 국가 기간산업도 당장 그들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

국가 기간산업에 대해 외국 자본의 인수를 통제하는 미국의 엑슨 플로리오(Exon Florio)법과 같은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또 포이즌 필, 차등의결권 등 기업 차원에서 행사 가능한 경영권 방어 수단을 허용해 소모적이고 비효율적인 M&A 시도가 걸러지도록 해야 한다. 모토로라와 AT&T는 포이즌 필, 구글과 포드자동차는 차등의결권, 골드만삭스와 스프린트는 둘 다 행사하는 데 반해 국내 기업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황인학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연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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