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운 펄펄한데 오라는 데 없고” 5070 고학력 중산층 구직↑

  • 입력 2006년 9월 29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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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동구 행당동에 사는 조경환(가명·71) 씨는 한 달 전부터 서울 시내의 한 복지시설로 출근하고 있다. 노인과 장애인들의 식사를 돕고 매일 ‘교통비’ 1만 원씩을 받는다. 고령자취업알선센터에 구직 신청을 하고 두 달을 기다려 얻은 일이다.

고교 상담교사로 일하다 1999년 정년퇴직한 조 씨는 단순 노동보다 ‘전공’인 상담업무를 원했지만 일자리가 없었다. 보수도 마뜩지 않다.

그는 현재 매달 200만 원 이상의 연금이 나오고 본인 명의의 집도 있다. 남매인 자녀도 모두 결혼시켰다.

다른 사람이 보면 꼭 일을 해야 할 상황은 아니지만 조 씨의 생각은 다르다.

“일할 수 있을 때 좀 더 벌기로 했어. 나이가 드니 부부의 의료비 지출이 늘어나는데 생활이 빠듯한 아이들에게 손 벌리고 싶진 않아.”

고령 인구가 급격히 늘면서 고학력, 중산층 노인도 구직(求職) 활동에 본격 나서고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 적합한 일자리는 턱없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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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의 질이 문제’

기업 은퇴 10년만에 월40만원 지하철택배

서울시 고령자취업알선센터에 따르면 올해 1∼8월 서울 15개 산하 센터에 구직 신청을 한 55세 이상은 5086명으로 이미 지난해 전체 구직 신청자 4756명을 넘어섰다.

특히 이 가운데 전문대졸 이상 고학력 구직자는 846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581명에 비해 45.6%나 늘었다. 자기 집을 소유한 구직자도 지난해 같은 기간 1981명에서 2721명으로 37.4% 증가했다.

구직자는 늘지만 새로운 일자리는 마련되지 않아 취업률은 낮아지고 있다. 올해 취업자는 3301명으로 구직자의 64.9%. 그러나 지난해엔 77.5%였다.

‘취업의 질’도 좋은 편이 아니다. 취업 노인 가운데 38.1%는 일당 2만 원(월 60만 원) 미만의 보수를 받는다. 반면 월 100만 원 이상을 버는 노인은 4.7%에 불과하다.

명문대 상대를 졸업하고 대기업 임원까지 지낸 이민구(가명·69·영등포구 대림동) 씨가 은퇴 후 10년 만인 올해 다시 찾은 일은 지하철 택배다. 이 일자리 말고 다른 선택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씨는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물건을 배달하다보니 몸무게가 5개월 만에 8kg이 빠졌다”며 “하루 9시간을 일하면 월 40만 원을 번다”고 말했다.

‘불황 따른 세태 변화’

자식도 힘들고… 살아갈 날 많고… 노후강박감

이처럼 고학력 중산층 노인마저 재취업을 원하는 것은 경기 불황과 세태가 변하면서 자녀의 부양을 기대하지 못하는 탓이 가장 크다. 사회보장제도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고 ‘자아 성취 욕구’가 상대적으로 더 강한 것도 영향을 미친다. 금융회사 출신인 김병우(가명·71·관악구 신림동) 씨는 큰아들(38)이 사법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면서 올해 초 구직에 나섰다. 공무원인 며느리의 월급으로는 넉넉지 않기 때문이다. 이 씨는 “월 20여만 원인 국민연금은 용돈에도 부족하다”고 말했다.

평균 기대 수명이 늘어나면서 ‘더 늙을 때’를 대비해야 한다는 강박감도 있다. 고령자취업알선센터에 구직을 의뢰한 70세 이상 구직자의 비율은 2003년 26.3%(1342명)로 2003년 15.7%(753명)에 비해 10.6%포인트 증가했다.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인구 비율은 2005년 9.1%에서 2010년엔 10.9%, 2020년엔 15.7%에 이를 전망이다.

‘정부-기업 함께 나서야’

정년 연장 장려…고령 구직자도 눈높이 낮춰라

정부는 이달 중순 ‘고령자 고용촉진 기본계획’을 세우는 등 뒤늦게 고령자 노동력 활용 대책에 나섰다.

노동부는 “고령자의 정년을 연장하는 기업에 장려금을 지급하는 방안을 2008년 도입할 것”이라며 “재취업을 위해 능력을 개발하고, 퇴직자의 재취업을 도운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안 등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정부뿐 아니라 기업이 고령자 채용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상우 연구원은 “유럽이 사회적 합의에 따라 퇴직자 문제를 기업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곧 한국도 고령 퇴직자를 기업이 책임지는 시기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노동연구원 신현구 책임연구원은 “고용 형태와 임금체계를 다양화하는 연구를 통해 노인 인력을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학력 노인 구직자도 ‘눈높이’를 낮추는 등 사회 전반의 의식 전환도 필요하다. 미래에셋투자교육연구소 강창희 소장은 “정년퇴직 후 재취업할 때는 현역에서의 일은 완전히 잊어야 한다”며 “사회적으로도 ‘일하는 노인’을 측은하게 바라보지 말고 당연하게 여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나연 기자 larosa@donga.com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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