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 잘나간다 싶더니…“상가 넘깁니다, 권리금 없이”

  • 입력 2006년 7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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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유통업체 L사의 마케팅 부서에서 차장으로 근무하다 지난해 가을 회사를 그만둔 김모(38) 씨.

특기를 살려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히트를 친 다이어트 운동기구의 판권을 사 국내 유통업에 뛰어들었다. 사장 명함을 가졌다는 흥분감도 잠시, 회사는 수익은커녕 자본금마저 까먹게 됐다. 김 씨는 데리고 있던 직원 4명을 모두 내보낸 뒤 지금은 새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김 씨는 “소비 심리가 이 정도로 꽁꽁 얼어붙은 줄은 미처 몰랐다”며 “한번 실패한 경험이 워낙 뼈아파 지금은 무슨 사업을 하려 해도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직장 생활을 그만둔 중장년층의 ‘마지막 탈출구’ 자영업이 다시 위기로 몰리고 있다. 지난해 말 반짝 회복 기미를 보이던 소비심리가 다시 위축되고 올 하반기 경기 전망마저 깜깜해 자영업자들의 한숨 소리가 깊다.

○ 상가권리금 뚝…경매물건도 급증

경기 고양시 일산신도시에서 A급 상권으로 통하는 지하철 3호선 대화역 주변 일대.

중개업소에는 ‘급매물’, ‘권리금 없이 물건을 넘깁니다’라는 상가 매물 안내문이 곳곳에 눈에 띈다.

D공인중개사 이모 사장은 “B빌딩 식당 7곳 가운데 4곳이 최근 문을 닫았다”며 “연초만 해도 2000만 원 정도 붙었던 권리금이 사라진 곳이 적지 않다”고 귀띔했다. 실제 대화역 인근 상가 권리금은 2분기(4∼6월)에 전 분기보다 19.50%나 폭락했다.

서울에서도 특A급 상권으로 꼽히는 서대문구 신촌 일대 부동산중개업소에도 상가 매물이 수북이 쌓여 있다.

법원 경매에 부쳐지는 물건도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

법원경매정보업체 태인컨설팅의 이영진 이사는 “상반기에 전체 경매물건은 줄었지만 대표적인 자영업자용 물건으로 꼽히는 오피스텔과 숙박시설은 각각 7117건과 2405건으로 통계가 공식 집계된 2000년 이후 가장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경기 전망이 어두운 하반기에도 이런 추세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 업종 변경서 가격 파괴까지 생존 안간힘

경기 광명시 철산동 철산성당 인근에 위치한 B호프집.

20평 남짓한 매장에서 4년 동안 장사해 단골손님도 꽤 있고, 좋을 때는 월평균 800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하지만 최근 손님이 뚝 떨어지며 매출이 600만 원대로 내려앉았다. 견디다 못한 주인 K 씨는 호프집을 내놓고 PC방으로 바꾸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이처럼 최근 들어 업종을 바꿔 위기를 탈출하려는 자영업자들이 늘고 있다.

국세청이 서울의 한 세무서에서 올해 접수한 사업자등록 건수를 분석한 결과 업종변경 건수는 1월 1041건에서 5월에는 1324건으로 300건가량 늘었다.

서울 중구 명동 지역 구두점과 양복점에선 ‘50% 할인’ 현수막을 붙여 놓은 지 오래다. 명동에서 수제화를 파는 문재선 씨는 “50% 세일 표시를 붙여 놔도 중국산 신발이 노점에서 팔리니 당해낼 재간이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 기업형 프랜차이즈도 개업 주춤

경기 침체 여파로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대기업 프랜차이즈에도 불똥이 튀고 있다.

가맹점만 3500여 개에 이르는 한 의류 브랜드 프랜차이즈 업체 관계자는 “올해 들어 5월까지 월평균 신규 창업 점포가 100개 정도였지만 6월 들어 60개 정도로 줄었다”며 “상황을 지켜본 뒤 투자하겠다는 예비 창업자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패스트푸드점의 경우 신규 출점뿐만 아니라 기존 가맹점 수도 줄고 있다.

국내 패스트업계 시장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롯데리아는 1월엔 가맹점이 680개였으나 5월에는 660개로 줄었다. 1∼5월 새로 문을 연 가맹점은 30여 곳이지만 50여 곳이 문을 닫아 20개나 감소한 것이다.

2003년 개점 이래 꾸준히 점포수와 매출을 늘려 왔던 죽(粥) 전문 프랜차이즈 ‘본죽’도 상반기에 처음으로 매출이 작년 동기보다 감소해 가맹점주들의 대책 마련 요구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중앙대 홍기택(경제학) 교수는 “대기업 중소기업 가릴 것 없이 까다로운 세제나 토지 이용, 금융 조건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며 “이런 규제를 풀고 서비스산업을 육성해 저소득 자영업자들이 안정적으로 사업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음식업중앙회 허홍구 홍보국장은 “갈수록 높아지는 세금과 건물관리 비용, 과도한 신용카드 수수료, 자영업자에 대한 낮은 사회적 인식 등 자영업을 옥죄는 요소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황재성 기자 jsonhng@donga.com

나성엽 기자 cpu@donga.com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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