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권순활/‘운동권 경제관’ 의 덫

  • 입력 2004년 6월 6일 18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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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재 경제부총리는 요즘 고민이 많아 보인다. 좀처럼 소비와 투자가 살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4일 정례 브리핑에서는 “우리 국민과 기업이 자신감과 신뢰를 갖지 못하는 덫에 빠진 것 같다”며 “저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라고 털어놓았다.

어디 답답한 사람이 이 부총리뿐이겠는가. 지난해에는 두 차례에 걸쳐 7조4775억원의 추가경정예산이 편성됐다. 그렇게 했는데도 경제성장률은 3.1%에 그쳤고 일자리는 3만개 줄었다. 국가채무는 32조원 늘어 165조원을 넘어섰다.

‘베이스’가 되는 작년 경제 성적표가 워낙 바닥을 기어 올해는 통계 측면에서 유리하다. 하지만 많은 국민이 더 살기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여당의 참패로 끝난 6·5 재·보궐선거도 이런 성난 민심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보자. 왜 이렇게 경제가 죽을 쑤고 있는가. 때로 분에 넘친 자신감까지 보이던 국민과 기업이 무엇 때문에 위축되고 흔들리는가. 문제의 핵심은 ‘운동권 경제관’의 득세인 것 같다.

운동권 경제관은 창조적 생산의 중요성과 어려움을 경시한다. 개인 자유 성장 실질보다 집단 평등 분배 명분에 집착한다. 성장 없이는 분배구조도 악화된다는 실증적 지표를 들이대도 막무가내다.

이런 사고는 일견 매력적이다. 어떤 사회든 상대적 박탈감을 가진 사람이 더 많다. 더구나 한국은 단기간에 압축 성장의 길을 밟았고 그 과정에서 그늘도 적지 않았다. ‘선량하고 가난한 다수’와 ‘탐욕스러운 가진 소수’를 대립시켜 ‘모두 잘사는 평등한 세상’을 외칠 때 적지 않은 호소력을 지닌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철 지난 이념의 광휘(光輝)는 잠시 찬란할지 모르지만 곧 허망해진다. 공동체의 분위기가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오판하고 질주할 때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가 찾아온다.

민간의 활력을 옥죄고 개인과 기업 활동에 정부가 많이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라에서 경제는 움츠러든다. 그 정도가 심할수록 더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옛 사회주의 국가들조차 뼈저린 실패를 경험한 뒤 마르크스와 레닌을 버리고 한때 매도의 대상이었던 애덤 스미스와 하이에크를 ‘정신적 스승’으로 삼아 경제개혁에 나서고 있다.

대기업을 보는 눈도 이제 달라져야 한다. 미국 저널리스트 대니얼 핑크는 새로운 경제생태계에는 여러 마리의 코끼리(초대형 기업)와 수없이 많은 생쥐(프리에이전트)가 함께 살아가고 중간크기의 종은 점점 멸종되어 갈 것으로 예상한다. 이미 한국 간판 기업의 주요 경쟁상대는 더 큰 덩치를 지닌 구미(歐美)와 일본의 글로벌기업이다. 때로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지만 우리 기업들의 문제점만 침소봉대하고 공격하면서 발목을 잡을 때가 아니다.

시베리아 벌판에 도시 하나를 짓고 낙원이라 명명한다고 해서 날씨가 좋아지지 않는다. 무작정 플래카드를 내걸고 슬로건을 외치며 평등과 행복을 주장한다고 해서 사회가 발전하지 않는다(제임스 데이비드슨 & 윌리엄 리스모거 공저, ‘대변혁’에서).

운동권 경제관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한국 경제의 미래는 어둡다.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물론 다음 세대의 운명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느냐에 상당 부분 달려 있다.

권순활 경제부차장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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