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기업 ‘相生시대’…빚 독촉보다 회사 살리기가 우선

  • 입력 2004년 3월 29일 18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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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져 가던 중소기업이 은행의 경영컨설팅 및 자금지원으로 재활하는 사례가 늘고있다. 29일 효자원 정용택 사장이 하나은행 경영컨설팅팀과 향후 사업전략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권주훈기자
쓰러져 가던 중소기업이 은행의 경영컨설팅 및 자금지원으로 재활하는 사례가 늘고있다. 29일 효자원 정용택 사장이 하나은행 경영컨설팅팀과 향후 사업전략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권주훈기자
“대출금을 어떻게 갚나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갑자기 주거래 은행에서 ‘컨설팅’을 받아보겠느냐는 제의가 왔습니다.”

올해 1월 빙과류 제조업체 효자원의 정용택(鄭龍澤) 사장은 하나은행으로부터 뜻밖의 도움을 받게 됐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말 서주아이스우유를 인수한 효자원은 직원 수를 4분의 1로 줄이는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해 왔다. 하지만 2003년까지 5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며 원리금 상환에 허덕여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은행 컨설팅 팀은 효자원을 3주간 정밀 진단했다. 진단결과는 ‘웰빙(well-being) 추세’에 맞춰 고급아이스크림 시장을 겨냥한 새로운 브랜드 도입이 필요하다는 것. 자금문제는 하나은행의 결단으로 풀렸다. 원리금 상환기간을 유예해주기로 한 것.

최근 들어 기업 살리기에 나서는 은행들이 늘어나면서 은행과 기업의 관계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이 같은 움직임은 시장경제 발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시장경제가 발전하려면 기업과 은행의 건전한 파트너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빚을 받으려면 기업을 살려라=정 사장은 “이제 새로운 사업에 진출하기 위한 경영전략을 짜고 있다”면서 “기업을 살리기 위해 은행과 함께 고민하는 과정에서 은행을 신뢰하게 됐다”고 말했다.

하나은행 이화수(李和洙) 경영컨설팅팀장도 “기업에 대한 은행의 적극적 컨설팅은 기업에는 회생의 기회를 주고 은행은 건전한 기업고객을 늘리는 윈윈 게임”이라고 설명했다.

효자원에 대한 컨설팅은 기업의 부실채권 관리방식을 ‘무조건적 회수’에서 ‘기업회생을 통한 대출 건전화’로 바꾼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하지만 은행의 일반적 영업 관행은 여전히 기업이 죽든 살든 내 돈부터 받아내자는 것.

올해 초 조류독감으로 부도위기를 맞았던 A닭고기 가공업체의 사장은 “조류독감보다 은행이 더 무서웠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사정이 좋을 때는 서로 돈을 빌려주겠다고 덤비더니 힘들어지니까 당장 ‘우리 돈부터 내놓으라’며 경쟁적으로 대출을 회수해갔다”고 말했다. 이런 은행들의 행태는 기업과 은행 사이에 깊은 불신의 골만 남겼다는 지적이다.

▽기술력과 경영자의 의지가 최고의 ‘담보’=자동차 실린더 헤드 생산업체인 천양산업의 정평진(鄭坪鎭) 사장은 2002년 5월 경영을 합리화하기 위해 GM대우에 같은 부품을 납품하는 중소기업을 인수합병하기로 결심했다. ‘규모의 경제’를 통해 도약을 꿈꿨던 것.

역시 자금이 문제였다. 마땅한 담보를 제공하지 못한 그에게 대부분의 은행들은 대출을 거절했다. 그러나 이 회사의 기술력을 높이 평가한 우리은행 기장지점은 계약대금 7억원을 담보 없이 신용대출해주고 운영자금으로 쓰도록 어음 15억원도 유리한 조건으로 할인해줬다.

이후 천양산업은 GM 다임러크라이슬러 등 세계 유수의 자동차 업체에 부품을 납품하면서 2001년 68억원이던 매출액이 2003년 231억원으로 급증했다.

기장지점 중소기업담당 김기주(金起周) 차장은 “은행 내에서 일부 반대의견이 있었지만 공장을 방문해 ‘오너’의 의지와 기술력을 확인하고 소신껏 대출해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말했다.

한국금융연구원의 한상일(韓相壹) 연구위원은 “외환위기 이후 인수합병으로 은행들의 규모가 커지면서 은행과 중소기업의 연결고리가 크게 약화된 것이 사실”이라며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서도 은행들은 우량 중소기업과 상생(相生)의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창원기자 changkim@donga.com

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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