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최악 성적표' 우려]비전不在…파업…태풍

  • 입력 2003년 9월 16일 18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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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신용평가기관의 하나인 영국 피치가 16일 올해 한국 경제 성장률을 1%대로 전망한 것은 우리 경제에 대한 외부의 평가가 극히 나빠졌음을 보여준다.

일부에서는 피치가 경제분석 전문기관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이번 성장률 전망치의 의미를 축소하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최근 민간 연구기관들은 물론 한국은행까지 성장률을 하향조정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피치의 전망’은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견해가 많다.

▽쌓이는 악재=피치는 보도자료에서 한국이 1300억달러의 외환보유액을 갖고 있고 순(純)대외채권국이라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에 따라 국가신용등급은 기존 A등급을 유지키로 했다.

하지만 불안한 노사관계, 카드 빚으로 인한 소비 위축, 설비투자 부진으로 인해 올해 성장률은 1%대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또 한국이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첫 번째 경기침체에 돌입했다고 분석했다.

박승(朴昇) 한은 총재도 16일 “기업들의 투자가 부진한 것은 경제전망이 불투명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라며 “경쟁국에 비해 임금이 비싸고 노사문제의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 등의 고(高)비용 구조가 문제이며 이를 바로잡는 것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금융계 인사들도 소비를 억누르고 있는 카드채 문제가 완전히 치유되기까지는 앞으로 1년 넘게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피치와 한은의 분석이 기존 한국 경제의 문제점을 지목한 것이라면 국내 연구기관들은 태풍 ‘매미’라는 외부 변수와 여름철 호우(豪雨)로 인한 쌀 수확량 감소라는 돌발 악재까지 겹쳐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언오(李彦五) 상무는 “경기가 올해 2·4분기(4∼6월)를 기점으로 상승할 것으로 내다봤지만 화물연대 사태와 태풍 등 악재가 쌓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 상무는 “실물경제보다는 부동산 등으로 돈이 쏠리는 분위기가 전혀 개선되지 않아 기업 투자와 소비 심리가 여전히 바닥권”이라고 덧붙였다.

최근 들어서는 일시적인 악재뿐 아니라 한국 경제가 구조적인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정부 연구기관 관계자는 “정부의 취약한 위기관리 능력, 비전 부재(不在) 등으로 인해 악재를 극복할 여력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경제 속내용은 외환위기 때보다 심각=한국 경제는 이미 외환위기 때 ―6.7%라는 치욕적인 성장률을 경험한 바 있다. 하지만 최근 경제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당시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라는 분석이 적지 않다.

외환위기는 ‘돌발적 외부 악재’ 성격이 적지 않고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경제도 동반 침체했지만 올 들어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각국이 완연한 회복기에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은 올 2·4분기를 기점으로 경기가 상승 추세에 접어들었다. 일본도 2·4분기 성장률이 전분기 대비 1% 증가한 3.9%에 달했다. 중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대만 등도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등 걸림돌이 해소됨에 따라 경기가 좋아지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올 들어 2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직전분기 대비)을 기록했으며 3·4분기(7∼9월) 성장률도 그리 좋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외환위기 때는 금리 인하와 재정 투입이라는 경기 조절 수단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기대하기 어렵다.

정부가 이번 태풍으로 인한 피해 복구를 위해 새로 편성할 것을 검토 중인 2차 추가경정예산은 경기 회복과는 무관하다. 또 재정이 이미 나빠진 상태여서 쉽게 부양책을 쓸 처지도 아니다. 금리도 올 들어 2차례나 내린 데다 그나마 경기 회복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고기정기자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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