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성훈/농어촌 신음소리 들었는가

  • 입력 2003년 9월 13일 17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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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문해서인지 모르지만 올 추석만큼 국민의 마음을 깊은 시름과 불안에 떨게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비가 많이 내리고 태풍이 휩쓸고 가 어느 때보다 자연재해가 컸다는 것 때문만이 아니다.

멕시코 칸쿤에서 날아든 고 이경해(李京海)씨의 비보는 모처럼 고향을 찾은 1000만 귀성객과 함께 전국 농어민들의 마음을 한없이 울적하게 만들었다.

무엇이, 누가, 사랑하는 딸의 결혼을 2주일 앞둔 홀아버니로 하여금 이역만리 타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었을까. 지난 수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에서 알게 모르게 100여명의 농민이 빚에 쪼들려 목을 매거나 살길이 막막해 농약을 먹고 죽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짝 않던 우리 사회의 비정함과 정부 당국의 무관심이 농업인의 시름의 근원이 아니었던가. 한때나마 공직에 몸담았던 필자 역시 자괴감에 밤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개방 물결에도 판에 박힌 정책뿐 ▼

5000여년을 이어 온 생명농업을 ‘무역상품’으로 취급하는 우루과이라운드(UR)와 세계무역기구(WTO), 그리고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탓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사회 내부를 들여다보면 무역자유화로 인해 약자인 농어민은 피해를 보는 반면 일부 계층은 그 혜택을 봐 오히려 잘산다는 데에 비극의 씨앗이 내재한다. 후자가 여론을 만들고 정치에 영향을 미치며 정책을 지배하는 사회가 우리의 현실이라고 말하면 과언일까.

시장경제와 무역자유화가 오늘날 서구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된 것은 그 이면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존 힉스의 ‘보상의 원칙’과 롤스의 ‘최약자 보호원칙’이 언제나 뒤따랐기 때문에 가능했다. 정책의 수혜자와 피해자간에 형평을 기해야 한다는 이 같은 원칙은 오늘날 자본주의체제가 공산주의체제를 압도할 수 있게 만든 요인이기도 하다는 점을 유독 우리 사회는 주목하지 않고 있다.

농어민이라고 해서 규모를 키워 경쟁력을 높이고 시장개방화로 무역입국을 해야 한다는 주장과 계획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막상 땅 한 평을 늘리려 해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수준인 땅값을 어디서 조달한단 말인가. 또 농업수지는 누가 보장할 것인지, 오갈 데 없어 기왕지사 농사로 연명하고 있는 노인들을 어디로 내보낼 것인지에 대한 대책은 빈약하고 주장만 크다.

가격을 내려 국제경쟁력을 높이라지만 미국보다 비싼 인건비와 자재비, 그리고 6.5%나 되는 상호금융 이자를 무슨 수로 감당할 것인가. 대기업 오너는 수조원의 빚을 져도 이를 공적자금으로 땜질하고 자기 몫은 따로 챙기는 게 다반사이지만 농어민은 속수무책이다.

이번 사태가 진정되면 또 무슨 몇 십조원의 ‘농어업 10개년 투자계획’이 화려하게 등장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과거의 농어업 투자계획이 얼마나 허구적이었던가. 오늘의 농어촌 현실을 제대로 읽고, 제대로 된 대책을 세워야 한다.

과거 농업투자가 내실을 거두지 못한 데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무엇보다 농촌과 농민대책은 없고 농업정책 일변도였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농촌의 교육 의료보건 복지 문화 대책은 갈수록 위축되고 농어업 생산유통 대책만 존재하다 보니 농어민은 정부 각 부처의 정책대상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교육인적자원부 행정자치부 보건복지부 산업자원부 건설교통부 여성부 등 정부 부처가 모두 농어민 대책에 나서야 하고 청와대와 총리실이 이를 독려해야 한다.

▼ ‘삶의 질’ 끌어올릴 실질대책 시급 ▼

국민소득 2만달러를 이루겠다는 노무현(盧武鉉) 정부의 계획도 그 저변에 보상의 원칙과 최약자 보호 원칙이 살아 움직이지 않는다면 시장 실패와 정책 실패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농촌 농업 문제가 농민만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소비자를 포함한 전 국민의 문제라는 사실을 추석 귀성객들은 새삼 느꼈을 것이다. 선진국은 농촌과 도시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모든 분야에 차별이 없는 나라라는 사실도 연휴 동안 외국 여행을 한 부유층들이 깨달았으면 한다.

“WTO, FTA, 그 무엇이 닥쳐온다 해도 대한민국 농어민의 삶을 선진국 수준으로 확실히 끌어올리겠다”는 대통령의 의지와 약속을 전국의 농어민은 기다리고 있다.

김성훈 중앙대 교수·전 농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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