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하기 힘든 나라]<1>한국 땅 떠나는 기업들

  • 입력 2003년 8월 17일 18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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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 생산의 주역이며 '자본주의의 꽃'이다. 기업의 경쟁력이 국가의 부(富)와 경쟁력을 결정한다. 왕성한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과 창의성은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사회는 반(反)기업 정서가 심각한 수준이다. 현재 한국 경제가 투자부진으로 인한 침체의 늪에서 허덕이고 성장잠재력마저 훼손되는 배경에는 기업과 사회간 뿌리 깊은 불신이 자리하고 있다는 진단도 나오고 있다. 본보는 대한상공회의소와 공동으로 반기업 정서의 뿌리를 드러내는 기획시리즈를 싣는다. 반기업 정서의 현상과 원인, 이를 발전적으로 치유할 대안이 모색될 것이다.》

기업과 지역사회의 관계를 보여주는 두 사례다. 안타깝게도 한국에는 기업과 지역사회가 상생(相生)의 관계가 되기보다 잘못된 정치논리 등에 휘말려 서로 피해를 보는 일이 많았다.

▽기업에 대한 잘못된 인식=기업의 1차 목적은 이윤추구에 있다. 생산을 통해 이윤을 내고 이를 재투자해 새로운 고용을 창출하고 세금을 냄으로써 궁극적으로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은 기업의 목적 자체가 사회와 국가에 대한 기여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나아가 기업이 빈부격차 해소와 재산의 사회 환원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인식이 기업에 대한 잘못된 기대를 낳고, 잘못된 기대가 반(反)기업 정서로 연결된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국제경영원의 ‘영 리더스 캠프’를 운영하는 김성훈(金聖勳) 본부장은 “교육에 임하는 대학생들이 처음 질문하는 것을 보면 ‘한국 기업인은 악덕’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김 본부장은 “젊은이들은 논리적이라기보다 감정적으로 막연한 반기업 정서를 갖고 있다”면서 “이는 기업의 존재 이유가 국가와 사회공헌이라는 잘못된 전제에 바탕을 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광복 후 짧은 기간에 압축성장을 한 한국 특유의 기업사(史)도 반기업 정서에 한몫을 했다.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 과정에서 특혜와 정경(政經)유착 시비가 끊임없이 불거졌다. 부의 축적 과정에서 충분한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것.

반도체장비용 특수베어링 제조업체인 삼익LMS 심갑보(沈甲輔) 대표이사 부회장은 “한국인은 워낙 평등의식이 강한 데다 몇몇 기업의 부도덕한 행위가 보도될 때마다 일반인은 심한 박탈감을 느낀다”고 진단했다.

▽반기업 정서의 피해자는 국민=심 부회장은 “그러나 소득 2만달러를 넘어 선진국으로 가려면 사회인식도 달라져야 한다”면서 “기회 균등은 보장해야 하지만 결과의 불평등은 받아들여야 자본주의가 발전한다”고 강조했다. 반기업 정서를 없애지 않으면 한국은 미래가 없다는 것.

대한상공회의소 박용성(朴容晟) 회장은 “경쟁력이 떨어지는 산업이 해외로 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지금은 노트북PC 등 고급제품 공장까지 외국으로 나가고 있다”면서 “기업을 내쫓는 사회분위기가 문제”라고 말했다.

전경련 손병두(孫炳斗) 고문은 “반기업 정서 등으로 인한 기업의욕 감퇴는 엄살이 아니다”면서 “기업을 개혁의 대상, 규제의 대상, 범죄집단쯤으로 치부하면서 반기업 정서가 증폭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수한 인재들이 생산의 주역이 되기보다 고시촌으로 몰려가고 의사 등 자격증에만 매달리는 데는 기업경시 풍조도 한몫했다고 해석했다.

한국경제연구원 이수희(李壽熙) 선임연구위원은 “기업이 배척받고 갈등이 심해지면 결국 사회적 비용이 늘어나고 국가경쟁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신연수기자 ysshin@donga.com

대구=정용균기자 cavatina@donga.com

거제=이은우기자 lib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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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1…2003년 8월 거제도

부산 연안부두를 떠난 배가 경남 거제시 장승포여객선터미널에 다가서자 ‘거제문화예술회관’이 눈길을 끈다.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이 건물의 지붕은 호주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를 닮았다. 인구 18만명의 작은 도시가 700억원의 건립비를 어떻게 감당했을까.

이에 대해 김한겸(金汗謙) 거제시장은 “작년 1인당 시민소득은 1만8000달러를 넘었고 올해는 2만달러를 바라본다”고 말했다.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가 국가적 화두가 되고 있지만 거제시는 이미 달성한 셈이다.

대우조선, 삼성중공업의 직원과 그 가족만 10만여명. 거제시 생산의 55%가 두 회사에서 나온다. 이곳 학교나 병원, 복지시설 가운데 이들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은 거의 없다.

대우조선 노조는 춘투(春鬪) 때 직원보다 주민 눈치를 먼저 본다. 기업활동에 장애가 되지 않을지 주민들이 먼저 신경 쓰기 때문이다. 지역주민이 기업을 공동운명체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조국희 대우조선 이사는 “몇 차례 조선소와 지역경제가 함께 휘청거렸던 경험이 기업에 대한 주민의 인식을 바꿔놓았다”고 설명했다.

박영조(朴永祚) 거제시 의원은 “정당하게 벌어서 월급 주고, 세금 내고, 망하지만 않으면 기업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말했다.

◆사례2…2003년 8월 대구

대구 시민들의 맘속엔 삼성그룹에 대한 앙금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90년대 대구에 세운 삼성상용차를 외환위기 때 정리했기 때문이다.

적자가 누적된 상용차가 외환위기를 계기로 파산하게 되자 대구시는 삼성에 첨단 전자공단 개발 등 대체 투자를 요구했다.

대구시와 시민단체들은 이어 삼성그룹 응징을 위한 시민모임을 결성하고 제품 불매운동을 펼쳤다.

삼성은 “제품을 많이 생산할수록 적자가 커지는 기업은 정리하는 게 옳다”고 설득했지만 별로 먹혀들지 않았다. 대구 시민 김모씨는 “대구를 자동차산업 진출의 발판으로 삼는 등 특혜를 받고서는 잘 안 된다고 헌신짝처럼 버린 것”이라면서 “기업은 그렇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사실 삼성이 내륙 지역에 자동차공장을 유치할 때부터 기업의 이윤논리가 아닌 정치적 논리가 개입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풀이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것이다.

▼30대그룹, 국가 매출액 비중 44%▼

삼성전자 등 24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 삼성그룹은 지난해 312억달러를 수출해 우리나라 전체 수출의 19.8%를 담당했다.

삼성전자와 전기, SDI, 코닝 등 삼성 4개 계열사가 있는 수원시는 지난해 2542억원의 시세(市稅) 중 11.7%인 299억원을 삼성 4개사로부터 거둬들였다. 수원시 관계자는 “시가 직접적으로 거둬들이는 세수뿐 아니라 삼성 계열사가 수원에 있음으로써 중산층 이상의 주민이 많이 사는 등 지역 경제를 받치고 있어 삼성 계열사의 경기에 따라 지역경제도 부침한다”며 “기업의 비중과 역할은 크다”고 말했다.

울산시도 시세의 10%가량을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 등 두 업체에서 거뒀다. 두 업체가 있는 울산 동구의 인구 약 25만명은 대부분 두 회사 임직원과 가족들이다. 포항과 광양은 포스코가 지역 경제를 받치고 있다.

누가 뭐래도 기업은 생산 및 고용, 부가가치 창출의 핵심 주체다.

▽30대 대기업의 위상=자유기업원에 따르면 2000년 전체 종업원 수 중 30대 그룹이 고용하고 있는 인원은 약 3.0% 수준이다. 그러나 이들이 국민경제 전체 부가가치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2.9%나 된다. 더구나 매출액 비중은 43.7%로 훨씬 높다.

자유기업원 최승노(崔勝老) 대외협력실장은 “경제력 집중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 때문에 요즘은 30대 그룹의 비중에 대한 집계를 하지 않지만 대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과 중요성은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산업연구원 김용렬(金龍烈) 기업정책실장은 “기업이 크다는 것만으로 규제의 대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며 “대기업을 국가 경쟁력의 견인차로 키워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실장은 “기업 경쟁력이야말로 국가 경쟁력의 선행 지표”라면서 “영국은 제조업 대기업들이 쇠퇴하면서 국가 경쟁력이 떨어진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라고 말했다.

▽기업 죽이는 반기업 정서=한국무역협회 고광석(高光奭) 이사는 “중국의 지도부가 개혁 개방 정책을 통해 이룬 가장 큰 업적은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중금주의(重金主義)’를 일깨운 것”이라며 “규모의 크기나 업종을 가리지 않고 모든 기업 활동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이끌어 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도 기업이 돈벌이를 통해 어느 분야 못지않게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는 인식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려대 이필상(李弼商) 교수는 “한국 고도성장의 기폭제 중 상당 부분은 기업인들의 피땀이었다”며 “기업과 기업인들이 신바람 나게 해보겠다는 분위기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구자룡기자 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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