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포커스]건설업 ‘오너 시대’ 막내리나

  • 입력 2002년 8월 27일 17시 27분



1977년 정주영(鄭周永) 당시 현대건설 회장은 1128억원짜리 ‘도박’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항만공사에 쓰일 해상구조물(재킷)을 울산에서 배로 운반키로 한 것.

모두 만류했다. 울산에서 주베일까지는 1만2000㎞. 경부고속도로를 15번 왕복하는 거리다. 이동 중에 재킷을 바다 속에 빠뜨릴 수도 있기 때문. 또 재킷이 제시간에 공사 현장에 도착하지 못하면 공사 기간을 맞추지 못할 수도 있는 것.

이런 이유로 1기(基)당 500t이나 되는 재킷은 공사 현장에서 직접 제작하는 게 ‘상식’이었다. 하지만 정 회장은 밀어붙였다. 그의 위험한 도박은 공사원가를 줄이려는 극약 처방이었다.

현대건설이 당시 주베일 공사를 따내면서 받기로 한 공사대금은 국내외 경쟁업체가 요구한 것의 절반 수준이었다.

이익을 내기 위해선 공사 원가를 줄여야 했고 그 방법 가운데 하나가 재킷을 한국에서 제작, 중동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t당 100만원으로 예상됐던 운반비용도 t당 30만원만 들였다. 정 회장은 비용을 줄이려고 보험마저 들지 않았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이후 현대건설은 중동에서 이름을 날리며 오일달러를 벌어들였다.

한국 건설업은 ‘오너의 역사’다. 현대건설 고(故) 정주영 회장을 비롯해 대우의 김우중(金宇中) 전 회장, 동아건설 최원석(崔元碩) 회장 등이 그들이다.

건설업에서 오너의 역할이 중요한 건 수주산업이기 때문. 공사가 끝날 때까지는 수익성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다. 진입장벽이 높은 해외건설은 더욱 그렇다. 결국 오너의 결단이 절대적이다.

하지만 2000년 이후 건설업계에서 오너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는 징후가 곳곳에서 눈에 띈다.

▼“경기 안좋을때 평가해야”▼

건설업계의 좌장(座長)격인 현대건설은 작년 8월 계열분리 후 심현영(沈鉉榮) 사장이 1년째 끌어오고 있다. 업계 2위인 대우건설도 99년 8월 26일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기업으로 선정된 뒤 남상국(南相國) 사장 체제로 만 3년을 채웠다.

삼성물산 건설부문이나 LG건설 등 다른 대형업체들도 오너의 입김보다는 전문경영인의 판단이 우선시되고 있다.

▽막오른 전문경영인 체제〓대체로 성공적이다.

현대건설은 올 상반기에 891억원의 순이익을 거뒀다. 상반기만 놓고 보면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채권단의 출자전환을 통해 지급이자가 줄어든 덕도 있지만 영업 구조도 좋아졌다는 평.

대우건설도 같은 기간 804억원을 남겼다. 작년 상반기보다 69% 늘었다.

전문경영인 체제가 확립된 것으로 평가받는 대림산업도 작년보다 417% 늘어난 548억원의 순익을 냈다. 이 밖에 LG건설이나 현대산업개발 롯데건설 등도 짭짤한 실적을 자랑하고 있다.

다만 전문가들은 내년이 전문경영인 체제의 성과를 판단하는 중요한 시기라고 평가한다.

올해는 국내 건설 경기가 활황이었다. 해외 부문도 ‘제2의 중동특수(特需)’라고 할 만큼 의외의 호기를 맞았다. 하지만 내년에는 국내 경기가 올해보다 못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전망이다.

건설산업연구원 현준식 책임연구원은 “전문경영인이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지만 이는 상당 부분 경기 호전 덕분”이라며 “본격적인 평가는 내년부터”라고 말했다.

▽오너 및 전문경영인 체제 비교〓아직도 논란이 분분하다. 건설업 특성상 강력한 오너십 경영이 필수적이라는 주장과 전문경영인에게 맡겨야 한다는 반론이 맞선다. 오너십 경영의 장점은 신속한 의사결정. 고 정주영 회장이 주베일 항만공사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을 때만 해도 외국의 경쟁업체들은 이미 실사를 마친 상태였다. 정 회장은 즉시 파격적인 공사비 인하를 단행했고 전략은 맞아떨어졌다.

▼수주보다 원가관리 중시▼

오너십 경영의 불가피성은 건설업이 어느 정도 투기성에 바탕을 둔 업종이라는 점과도 닿아 있다. 김호영(金虎英) 현대건설 전무는 “건설업에서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건 매출규모일 뿐 수익은 아무도 모른다”며 “악성 사업구조를 흑자로 전환시키는 건 오너식 추진력”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전문경영인 체제는 전문성과 수익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오너십 경영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다고 평가된다. 윤국진(尹國鎭) 대우건설 상무는 “개별 현장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문제를 오너가 단선적인 기준으로 판단하는 건 무리”라며 “과거처럼 ‘무조건 따놓고 보자’는 식의 오너식 경영이 건설업의 쇠락을 가져왔다”고 꼬집었다.

실제 대우건설이 15분 단위로 개별 현장의 의사결정 과정을 분석한 결과 전체의 80%가 ‘부정형(不定型) 업무’로 파악됐다. 일정한 틀에서 관성적 의사결정을 내리기보다는 매번 판이한 구조를 가진 사안들을 판단해야 한다는 것.

▽제조업으로 바뀌는 건설업〓오너십 경영과 전문경영인 체제에 대한 논란은 건설업 자체의 변화로 이어진다.

국내 공사만 해도 과거에는 회사간 담합이 가능했다. 지금은 1000억원 이상 공사에는 최저가 입찰이 적용된다. 수주 자체보다는 어떻게 수익을 남기느냐가 중요해졌다.

해외 공사에서도 저임금이라는 메리트가 사라졌다. 대신 엔지니어링과 기술력이 수주를 결정짓는 잣대로 부상했다. 그만큼 치밀한 원가관리가 요구된다.

현대건설이 매출을 작년보다 줄여 잡은 대신 순익 목표를 늘려 잡은 것도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다. 대우건설도 현장에서 그룹 회장으로 바로 연결되던 수주 업무 공정에 신규공사심의회를 추가했다. 주관부서와 법무팀 품질보증팀 사업관리팀이 종합적으로 판단해 수주 여부를 결정한다.

현대산업개발은 개별 현장과 본사를 잇는 전자결제시스템을 마련했다. 현장에서 발생하는 사안을 해당 부서가 일일이 확인하고 판단하는 방식. 제조업식 관리시스템이 도입되고 있는 셈이다.

황재성기자 jsonhng@donga.com 고기정기자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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