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기업들 “미래수익 불투명…주주 돈지갑 못열어요”

  • 입력 2002년 7월 10일 18시 45분


‘설비투자 부진현상이 꽤 길게 이어질 것 같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의 설비투자가 부진한 것과 관련, 국책연구소 및 민간경제연구소들은 이같이 전망하고 그 원인을 심도있게 분석하고 있다.

특히 올 1·4분기 경제성장률이 5.7%인데 반해 설비투자 증가율이 3.2%에 불과한 것에 대해 경제전문가들은 “불황에서 벗어날 무렵에는 설비투자 증가율이 경제성장률을 웃돈다는 상식이 깨졌다”며 ‘성장의 질(質) 저하’를 우려하고 있다. 재정경제부 등 정부 부처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그러나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막론하고 기업 관계자들은 “신규투자 세금감면 등 과거와 같은 단편적인 정책으로는 결코 투자가 늘지 않을 것”이라며 “정부가 기업환경과 내부 의사결정과정의 획기적인 변화를 심도있게 이해해야만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수익이 보장돼야 지갑 열어〓설비투자 부진의 가장 큰 요인은 기업의 투자결정 과정의 변화.

한화그룹은 내부적으로 신규투자 기준을 ‘투자수익이 금융비용+5%포인트 이상’으로 정했다. 그룹 최고위층은 금융비용+10%포인트를 요구할 정도. 다른 그룹들도 비슷한 기준을 갖고 있다.

반도체와 초박막트랜지스터액정표시장치(TFT-LCD) 등 일부 품목을 제외하고 시장점유율 확대나 외형성장을 추구하는 투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변화로 10대그룹이 현재 보유중인 현금이 10조원을 넘고 있다. 설비투자 자금 중 기업 내부자금 비중도 80년대는 35.3%, 90년대는 31.3%에 불과했지만 올해는 74.2%에 이른다.

▽기업지배 구조의 변화〓지난해 S그룹은 바이오산업 진출을 놓고 계열사 사장들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이 자리에서 결론이 나지 않자 회장은 신규투자를 최소화하면서 본격적인 투자는 훗날 다시 논의하기로 결정했다. “계열사들이 대규모 출자를 할 경우 주주들을 설득하기 힘들고 주가하락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총수가 받아들인 것.

현대의 조선 및 자동차 진출, 삼성과 LG의 반도체 진출 등 모험적인 투자전략은 앞으로 재현되기 힘들다는 것이 기업의 시각.

▽전통산업 투자는 해외로〓LG전자는 최근 단말기와 가전부분 투자는 중국에 하기로 결정했다. 투자분석 결과 한국보다 중국에 투자하는 것이 수익률이 훨씬 높은 것으로 나온 것. LG전자 권영수 부사장은 “기업의 투자는 확장, 신규, 시설대체로 나누어지는데 최근 확장투자는 대부분 해외투자로 돌리고 있다”고 밝혔다.

현대차도 올 4월 10억달러를 들여 미국 앨라배마에 승용차 공장을 짓기로 결정했다. 제너럴모터스(GM)와 르노삼성차의 시장진입으로 내수시장은 한계에 이르렀고 통상 마찰을 피하기 위해 미국에 공장을 짓기로 한 것.

중소기업도 마찬가지. 산업은행 설비투자분석팀 김철 팀장은 “한해 2조∼3조원에 이르는 해외투자 중 상당수가 중소기업”이라며 “해외투자가 지나치게 많을 경우 제조업 공동화와 실업률 상승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미래산업이 보이지 않는다〓삼성그룹의 전체 계열사는 현재 5조원이 넘는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삼성전자를 제외하고는 전 계열사는 신규투자를 거의 하지 않고 있다. 이건희 회장이 지적한 ‘5년 뒤에 기업을 먹여살릴 신규사업’을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

LG경제연구원 송태정 박사는 “한국의 주력산업 대부분은 이제 성숙기에 접어들었지만 마땅한 신규사업을 찾지 못하고 있다”며 “정부가 기업의 리스크를 일부 떠안아주는 신기술 신산업투자를 선도하지 않는 한 기업의 공격적인 투자를 유도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이병기기자 eye@donga.com 천광암기자 iam@donga.com 박정훈기자 sunshad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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