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실명제가 최근 정치권 재계 등의 집중포화를 맞으면서 실시 4년3개월만에 존폐의 기로에 섰다.
93년 8월13일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을 전격 발표하자 재계와 금융권 등은 「원칙적으로 환영하지만 충격이 우려된다」는 반응을 나타냈었다.
최근엔 외화난이 사상 최악의 시중 자금난으로 파급되면서 「위기양상이 너무 심각해 실명제 수술이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무게중심이 급속히 기울고 있다.
한편 실명제 보완 또는 유보 주장이 대통령 임기말 통치권 누수기를 맞아 지하자금의 도피처를 마련해 보려는 「큰 손」들의 물밑 집단행동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실명제의 공과〓전국경제인연합회는 지난 13일 실명제 보완을 조심스럽게 건의했던 그간의 태도를 바꿔 「실명제가 경제위기의 주범」이라고 공식 선언했다. 「실명제로 인해 저축률이 24%대로 낮아진 것이 외환위기를 불러왔다」는 주장이었다.
부의 상속이 어려워짐에 따라 과소비가 만연하고 이것이 국제수지 악화를 불러 현 경제난을 초래했다는 것.
「금융거래의 투명화」라는 공허한 이상론에 매달릴 때가 아니라는 상황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반면 한국금융연구원 박경서(朴景緖)자본시장팀장은 『실명제가 없었다면 전직 대통령 비자금 수사 같은 대형 정경유착을 파헤치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LG경제연구원의 김주형(金柱亨)이사는 『장영자 사건 때는 실명제도 없었는데 어떻게 계좌를 추적할 수 있었는가』고 반문하면서 『검은 돈은 돈세탁 방지법 등 다른 입법을 통해서 처벌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명제 폐지의 자금공급 증대효과〓폐지 및 보완을 주장하는 쪽이 가장 중시하는 부분이다. 전경련 등 재계는 실명제 실시로 인해 30조원 이상으로 추정되는 사채시장의 자금흐름이 막혀 금리가 상승하는 등 중소기업의 금융비용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무기명 채권이나 각종 조건부 실명채권 등으로 지하자금을 끌어들일 경우 막대한 지하자금을 산업자금으로 양성화, 현재의 자금난을 덜 수 있다는 주장이다.
벤처기업이나 유망 중소기업 쪽으로 지하자금을 돌릴 경우 우리 경제의 구조조정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
이에 대해 강철규(姜哲圭)서울시립대 교수는 『장롱속에 파묻힌 지하자금은 사실상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며 『이런 상황에서 무기명 장기채 등의 발행은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격에 불과하다』고 반론을 편다.
그러나 D그룹의 한 관계자는 『우리 경제의 각종 규제들은 필연적으로 규제를 회피할 비용을 기업에 강요한다』며 『실명제가 실시됐지만 기업규제는 풀어진 것이 없어 이중고를 겪어왔다』고 재반론.
▼실명제 폐지의 증시부양 효과〓일부 금융 관계자들은 실명제 보완 또는 폐지의 증시 부양효과에 대해 회의적이다. 93년 투자신탁회사에 2조7천억원의 한국은행 특별융자를 주면서 주가를 떠받치도록 했으나 효력은 단 며칠뿐이었다는 것.
그러나 적잖은 증시 관계자들은 실명제 폐지를 현재의 증시공황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호재로 인식하고 있다. 실제적인 효과를 따지기에 앞서 투자자들의 기대심리가 이미 상당히 확산돼 있어 어떻게든 보완해야 할 상황이라는 지적이다. 실명제 보완을 통해 조성된 자금이 모두 주식매입 자금으로 쓰인다는 보장은 없지만 당장 상장기업 부도사태는 막아줄 것이란 얘기들이다.
▼실명제 어떻게 해야 하나〓실명제 보완 또는 폐지 주장을 일축하는 전문가들 가운데서도 한국형 금융실명제의 태생적(胎生的) 한계를 지적하는 사람이 많다.
한은 관계자들은 『시행 초기에 「과거를묻지않겠다」는원칙을 살렸으면 지금같은 후유증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연구원의 박팀장은 『실명제의 대전제는 조세의 공평성』이라며 『우리 실명제가 조세의 공평성을 확보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지하자금을 끌어모으는 지혜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부 관계자들은 지난 3월부터 시작된 금융소득 종합과세를 일시 유보, 실명제보완논쟁을 누그러뜨리는 우회적인 방안을 대안으로 내놓고 있다. 「세금내려면 차라리 쓰고 만다는심리」는 억누를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LG경제연구원의 김이사는 『예금자들이 가명계좌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되 세율을 높여 불이익을 주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다만 서울시립대의 강교수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체제 아래선실명제보완이 현실적으로쉽지않을 것으로 관측했다. 단기적인 충격보다 장기적인 경제 구조조정을 원하는 IMF가 실명제 보완 또는 폐지에 소극적일 것이라는 얘기다.
〈윤희상·박래정·이희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