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바로 세우자 ⑤]망국에 이르는 병 「정경유착」

  • 입력 1997년 6월 9일 20시 47분


「바른선거문화 정착을 위한 토론회」
「바른선거문화 정착을 위한 토론회」
사정의 서슬이 시퍼렇던 金泳三(김영삼)정부 초기 韓利憲(한이헌·현 신한국당 의원)공정거래위원장은 사석에서 「정경유착 망국론」을 개진했다. 『정경유착은 기업의 경쟁력을 있는 그대로 시장에 반영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 고리를 끊는 것은 투명한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더욱 필요하다』 그러나 한위원장은 그후 청와대 경제수석 시절 한보그룹에 대출하도록 금융기관에 압력을 넣었고 이와 관련된 대가 여부에 대한 세간의 의혹에 지금도 시달리고 있다. 「국회 재경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수천만원 내지 수억원씩 챙기는데 청와대 경제수석이…」라는 시선이 그를 놓아주질 않는다. 정경유착과 기업경쟁력의 상관관계는 한보의 경우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한보철강 당진제철소 열연공장에 적정수준인 6천3백40억원이 투입됐을 경우 열연코일의 t당 가격은 100% 가동시 27만원. 鄭泰守(정태수)총회장은 이것을 7천9백억원이 들어간 것으로 장부를 조작하고 차액 1천6백억원을 비자금으로 조성, 이 가운데 일부를 로비자금 등으로 사용한 것으로 검찰조사 결과 밝혀졌다. 이 로비자금은 한보가 생산해낸 열연코일의 원가를 t당 28만원으로 끌어올렸다. 시장가격보다 5천원 높은 수준이지만 공장을 돌리기 위해 t당 5천원씩 밑지며 팔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정총회장의 정치권 로비는 결국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한보철강의 경쟁력을 약화시킨 것은 물론 당진제철소를 한국 철강업계의 「애물단지」로 만들어버렸다. 정경유착은 우리 경제의 고비용구조에 직접적인 요인이 되고 있다. 한 야당의원의 지방 지역구에서 후원회장을 맡고 있는 중소기업인 K사장(60)은 최근 연매출 50억원대의 소기업 사장인 한 회원이 내민 1천만원의 후원금을 받고 깜짝 놀랐다. K사장은 『예상대로 며칠 뒤 그 회원으로부터 10억원대의 지역 사업을 추진하는 데 도와달라는 요청이 와 몇군데 전화를 걸어줬다』며 『이 회원은 로비자금 지출을 메우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게 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정부 출범 이후 한보처럼 로비에 사활을 건 기업은 많이 줄었다고 기업인들은 얘기한다. 요즘은 로비를 통해 「한탕」하기보다는 「나중에 사업에 도움이 될까」해서 「보험」을 들어두는 정도가 대부분이라는 것. 대신 「보험료」 지급명세가 늘어났다는 것이 기업인들의 귀띔이다. D그룹 K이사는 『문민정부 들어 경제단체를 통해 준조세(準租稅)를 거둬들이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며 『4년여 사이에 각종 사업비 기금 성금 등의 명목으로 그룹당 5억∼6억원씩 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경제단체를 통해 우회적으로 모금하는 준조세도 최고권력자의 통치행위를 돕는다는 점에선 정치자금과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공정거래위원회가 해마다 발표하는 「30대 그룹집단」은 기업 입장에선 족쇄처럼 작용한다. 그룹 위상에 걸맞게 내야하는 돈의 액수가 정해지는 사례가 적지않기 때문이다. 반(半)공개적으로 수금하는 경우엔 특히 비슷한 규모의 다른 그룹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K이사는 『돈을 낼 때마다 마치 정치권이 「선착순」이라고 외치면서 「수금」하는 인상을 받았다』고 비판했다. 대선정국에 들어선 요즘 평소 연고가 있는 정치인들로부터 편지를 받는 기업인들이 많아졌다는 소리가 들린다. 「존경하는」으로 시작되는 서한은 찬사를 잔뜩 늘어놓은 다음 「앞으로 잘되면 잊지 않겠다」는 식으로 끝을 맺는다. 기업인에겐 회유 플러스 협박이다. 최근엔 편지를 보낸 정치인 자신이 정치개혁의 주도세력임을 은연중 과시하는 표리부동의 편지도 적지 않다. 『어떤 이는 「총 3천만원(법인 후원금 한도액)만 도와주면 이미 모은 5백만원과 합쳐 어떻게든 꾸려나가겠다」고 애걸조로 얘기합디다. 나중에 그런 식으로 모은 돈이 90억원이나 되는 걸 알았습니다』(D그룹 B이사) 대그룹들마저 경영실적이 바닥을 헤매고 있는 요즘 정치자금은 기업경영에 당장 큰 주름을 주고 있다. 지난 연말 기준 국내 51대 재벌그룹 중 순이익을 낸 그룹은 26개. 나머지 그룹도 부동산을 처분하거나 재고자산을 부풀려 가까스로 장부상 적자를 면한 그룹이 대부분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자금 등 준조세 부담은 기업으로부터 국민에게 전가되게 마련이다. <이영이·박내정기자> ▼ 나는 이렇게 본다--공병호 자유기업센터 소장 ▼ 한 나라의 정치자금은 관련법이나 관행, 그리고 유권자의 의식에 의해 좌우된다. 어느 면을 보더라도 지금의 우리 사회는 막대한 정치자금이 필요하게 돼 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기부 문화가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회에서 정치자금의 대부분은 기업들로부터 갹출되게 마련이다. 흔히들 『기업들이 돈을 주지 않으면 되지 않는가』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많다. 세상에 어렵게 번 자기 돈이 아깝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돈을 갖다 바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많은 기업들은 솔직히 정치권이 겁나서 갖다 바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패는 정확하게 그 나라 정치의 영향력에 비례한다. 경제원리에 의하지 않고 정치원리에 의해 자원배분이 이루어지는 사회일수록 부패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꽃을 피우게 된다. 정치자금은 부패 가운데서도 가장 덩치가 큰 부분이다. 기업들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은 지난번 몇몇 기업인이 사회를 향해 던진 규제와 뇌물요구 등에 관한 고발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도 했다. 지연이나 학연으로 얽히고 설킨 나라, 정치가 기업활동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에서 기업들은 정치자금 제공 요구를 뿌리칠 수 없다. 왜냐 하면 요구를 무시하거나 외면하면 이 땅을 떠나서 사업을 하지않는 한 감당하기 힘든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개방경제와 본격적인 저성장 시대에 막대한 정치자금은 기업의 경쟁력을 현저히 약화시키게 될 것이다. 변화하는 세상은 모든 나라가 동등한 환경에서 경쟁하는 시대를 뜻한다. 수십가지 준조세와 막대한 정치자금으로 자원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나라의 기업들이 온전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막대한 정치자금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번영의 토대인 기업들을 멍들게 하고 있다. 우리는 단기적으로는 돈이 적게 드는 정치제도와 관행을 이번에 반드시 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경제에 대한 정치의 영향력이 줄어들도록 법과 제도를 고쳐나가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남아있지 않음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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