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원에 있던 정신병원, 두 장의 사진으로 현실을 비판한 신문[청계천 옆 사진관]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4월 20일 1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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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욱의 백년사진 No. 57

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넘쳐나는 오늘을 살면서,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한 장씩 살펴봅니다. 독자들의 댓글을 통해 우리 이미지의 원형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1924년 4월 20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서울 창경궁을 찾아 봄꽃을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과 함께 정신병원 병동 사진이 실렸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요?

◇ 사진 위는 창경원의 봄 풍경과 아래는 총독부 의원의 동팔호실
사진 밑에 기사 두 꼭지가 이어져 있습니다. ◇애수의 동팔호(東八號) – 봄을 등진 세상 ◇환락의 창경원 – 봄을 맞은 세상.

두 꼭지의 기사를 아우르는 큰 제목은 <가곡(歌哭)이 一處에 交響: 춘광이 무색한 정신병자의 세상, 금일부터 밤놀이 한다는 창경원>입니다. 노랫소리와 곡소리가 한 장소에서 울려퍼진다면서 창경원 야간 개방 소식을 함께 전하고 있습니다. 동팔호는 창경원 안에 있던 정신병원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사진 순서와 달리 정신 병동 기사가 먼저 위치해 있습니다. 먼저 ◇애수의 동팔호 - 봄을 등진 세상 기사를 보시겠습니다.

◇ 哀愁의東八號 - 봄을 등진 세상

봄은 왔다! 꽃은 피었다. 창경원의 꽃소식이 가까워 오더니 총독부 의원 동팔호(東八號) 울타리 밑에도 씀바귀꽃과 개나리꽃은 그윽하게 봄소식을 전한다. 그러나 세상을 떠나고 봄소식을 등저서 까닭 모를 웃음과 이유없는 울음으로 날을 보내는 남녀 50명의 정신병자들에게는 고로 내리는 봄의 은혜도 미치지 못한다.

꽃을 보고 꽃인 줄 모르는 이에게 봄의 천사인들 무슨 기쁨을 그들에게 전하겠는가? 눈이 내리든 바람이 불든 그들은 다만 산송장과 같이 죄없는 몸을 유치장과 같은 병실에 눕혀서 다만 죽는 날만 기다리는 것이다. 같은 병에도 조선사람들에게는 전간증(癲癎症)이 많고 일본 사람에게는 매독에서 일어나는 마비성(痳痺性)이 흔하며 환자 전체로서는 정신없이 날뛰는 조발증(早發症)이 제일 많은데, 조선사람에게 전간증이 흔한 것은 대개 어렸을 때에 부모가 머리를 철없이 자주 때려서 그리된 것이라고 북촌(北村) 의관을 얼굴을 찡그린다. 봄이 되면 정신병은 발작이 더욱 심하여진다. 그러함으로 창경원 봄놀이꾼들의 웃음소리가 높아가면 동팔호의 신음하는 소리도 함께 높아간다. 애인의 이름을 부르며 팔을 벌리는 청년,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팔을 뽐내는 교원, 일억만원의 재산을 찾아야 하겠다고 내달리는 노인, 자나깨나 머리만 빗고 있는 처녀 그들이 모여 사는 동팔호에는 영원히 봄빛은 그 모습을 잃고 마는 것이다.
#이어서 ◇환락의 창경원 – 봄을 맞은 세상 기사를 보시겠습니다. 아래 사진에 해당합니다.

◇환락의 창경원 – 봄을 맞은 세상.

동팔호를 찾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창경원 앞을 지나야 돌아가게 된다. 인간의 지옥에서 돌아오는 이에게 찬란한 봄빛과 즐거운 웃음소리가 무슨 회포를 일으키겠는가. 날마다 날마다 모여드는 꽃 구경꾼! 수만 명 수천 명씩 드나드는 창경원의 봄놀이는 점점 가경으로 들어가 오늘부터는 수천 개의 전등을 밝혀 놓고 밤꽃놀이가 벌어질 터이라 한다. 가뜩이나 봄 한철 꽃놀이는 창경원이 독차지를 하여오던 끝에 밤놀이까지 벌려 놓으면 얼마나 번창하여지겠는가. 고대하던 벚꽃도 23~24일간에는 만개가 될 것이라 하며 밤놀이를 위하여 입장하는 이에게는 입장료를 따로 10전씩 받기로 되었다 한다. 첫사랑에 가슴을 졸이는 청춘남녀들의 사랑을 속삭일 새로운 무대는 그윽한 송림을 배경으로 크게 열리려 하는 것이다.

『창경원을 밤에도 연다!』밤은 인간의 모든 향략을 고조시키는 마술꾼이다. 꽃빛! 불빛! 분냄새! 숲속에 반짝이는 작은 동자(瞳子)들! 그것이 모조리 함께 얼크러저서 봄의 노래를 아뢸 때에 등성이 하나 넘어 있는 동팔호에서는 여전히 가긍한 산송장들이 꾸물 거릴 것이다.
# 내용이 이해되시나요? 저도 좀 어려웠습니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되던 전체 제목이 두 기사를 다 읽고 나니 이해가 됩니다. 한쪽에서는 봄놀이 나선 청춘들의 노랫소리가 들리고 한쪽에서는 정신병동에서 죽어가는 소리가 들린다는 내용을 대조시켜 전개하고 있습니다.
창경궁의 일제시대 이름이 창경원이라는 것과 1909년에 궁궐에서 동물원과 식물원이 있는 유원지로 변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1983년~1986년이 되어서야 동물들을 서울 동물원으로 이관하고 창경궁이라는 원래 이름으로 되돌아갔다는 사실도요. 하지만 이곳에 정신병원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번 기사를 통해 처음 알았습니다. 조선총독부의 동쪽에 있는 이곳은 1910년 이전에는 대한의원이었는데 1913년 일제가 동팔호라는 이름의 정신병동을 만들었습니다. ‘미친 사람을 가두어 두는 곳’이라면서 기자들과 인텔리들의 비판이 이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1931년 채만식 선생이 ‘동팔호실 잠입기 – 이상 남녀 40여 인’이라는 산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1934년 박태원 선생이 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도 동팔호실을 탈출한 정신병자의 한강 투신 사망 사건 얘기가 나온다고 합니다.

# 100년 전 기자가 이 기사를 쓰게 된 계기는 창경원이 이날 밤부터 야간 개장을 한다는 ‘보도자료’에서 시작되었을 겁니다. 보도자료라는 용어가 당시에는 없었겠지만 독자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하면 그렇습니다. 요즘도 창경궁과 덕수궁 등 4대 궁궐을 야간 개방을 한다는 서울특별시 보도자료가 언론사에 전달되는데 100년 전에도 이런 프로그램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봄을 맞아 청춘남녀들이 데이트를 즐길 수 있게 하겠다는 권력과 행정당국의 야심찬 계획을 신문사가 국민들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사는 입장료와 벚꽃이 만개했다는 정보 이외에 독자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 하나를 노골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궁궐 바로 옆에 정신병동이 들어서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권력을 직접 비판하고 있지 않지만, 민족의 품위를 훼손시킨 외세에 대한 불만이 녹아 있습니다. 기사의 내용도 그렇고 사진도 창경궁의 봄 풍경과 함께 같은 크기로 정신병원 사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홍보를 원했을 당시 권력자들에게는 신문의 비틀기가 몹시 거슬렸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 덧붙이기 ◆
두 장의 신문 사진은 언론사가 특정한 사안에 대해 입장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식적이긴 하지만 어떤 경우에 두 장의 사진을 병렬로 배치하는지 몇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목적은 공정성입니다.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도 중요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 정치 사진에서 여당과 야당의 회의 장면이나 대표의 얼굴을 나란히 보여주는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선과 악의 대비입니다. 북한 신문이 1990년대 말까지 자주 썼던, 남한 지옥 북한 천국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북한 모습과 그에 대비되는 한국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면서 체제의 우월성을 주장한 적이 있었습니다.

셋째, 현상과 본질을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눈앞에 벌어지는 풍경은 이렇더라도 내면에는 다른 본질이 숨어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의 주장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현상에 비해 본질은 사실보다는 의견이기 때문에 반론의 여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사진이 본질을 표현한다는 것이 현상을 표현하는 것에 비해 몇 배 더 어렵습니다.

넷째, 원인과 결과의 조합입니다. 누군가가 말을 하고 있고 그 말을 들은 청중이나 반대편의 표정을 보여주기 위해 두 장의 사진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주 다룬, 창경궁의 두 표정은 아마 세번째 이유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밖에도 다양한 이유로 두 장의 사진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추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오늘은 권력을 직접 비판하지 않지만 두 장의 사진이 현실을 비판적으로 표현하기도 하는 특징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널리즘의 역할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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