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이 벽돌 120장을 600만원에 샀다면? [영감 한 스푼]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2월 8일 1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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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안드레가 벨기에산 푸른 석회석을 가지런히 놓은 작품 ‘Belgian Blue Hexacube’ (1988). 테이트 미술관이 소장한 것과는 다른 작품이다. 사진: 대구미술관 제공
1972년 어느 미술관은 벽돌 120장을 가로 68.6cm, 세로 229.2cm, 높이 12.7cm로 가지런히 쌓은 작품을 삽니다.

이 작품은 1966년 미국 작가 칼 안드레가 만든 ‘등가 8’(Equivalent VIII)였죠. 미술관은 이 작품을 얼마에 샀을까요?

바로 6000달러, 단순 계산으로 600만 원입니다.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훨씬 더 비싼 가격이겠죠) 작품을 보고 가격을 들으면 많은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600만원이라면, 벽돌 한 장에 5만원어치인가? 아니면 쌓는 노동력도 포함인걸까? 미국 작가이니 배송비도…? 비슷한 논란이 영국에서 있었습니다.

“혈세 낭비” 영국 뿔나게 한 ‘벽돌’
칼 안드레, ‘Equivalent VIII’, 1966년. 영국 테이트 미술관 소장.
칼 안드레, ‘Equivalent VIII’, 1966년. 영국 테이트 미술관 소장.
이 ‘벽돌’ 작품을 산 곳은 영국 테이트 미술관입니다. 테이트는 1974, 1975년 작품을 특별 전시로 선보였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스캔들이 일어난 것은 1년 뒤인 1976년. 영국 주간지인 ‘더 선데이 타임스’가 작품 가격을 보도하며 “한가한 작품에 혈세를 낭비했다”고 비판한 뒤였습니다.

더 선데이 타임스는 테이트 미술관이 정부로부터 매년 100만 달러가 넘는 예산을 받으면서, 존 컨스터블처럼 제대로 된 작품이 아니라 쓸데없는 곳에 세금을 낭비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심지어 첫 보도에서는 미술관이 산 가격의 두 배인 1만2000달러로 작품 가격이 잘못 알려지면서 분노를 부채질했죠.

건설 현장에 쌓인 벽돌 사진을 두고 ‘대단한 예술 작품’이라고 풍자한 영국 신문 기사.
건설 현장에 쌓인 벽돌 사진을 두고 ‘대단한 예술 작품’이라고 풍자한 영국 신문 기사.
그 후 영국의 언론들은 공사 현장에서 벽돌에 기댄 노동자의 사진을 “끝내주는 예술 작품”이라고 게재하거나, 벽돌 무더기를 삽화로 그리고, 타블로이드 언론은 건설 기술자가 헤링본 모양으로 예쁘게 쌓은 벽돌이 훨씬 낫다고 주장하는 등 테이트의 결정을 풍자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예술부 장관이 나서 “테이트 이사회는 실험적 예술에 예산을 쓸 모든 권리를 갖고 있다. 나는 그들의 판단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언론에 밝히며 미술관의 결정을 옹호했죠.

미술관은 작품이 관심을 받자 1976년 2월 다시 수장고에서 꺼내 전시장에 놓았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시민이 와서 벽돌 위에 페인트를 뿌리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답니다.

지금 가치는 수십억, 미술관의 승리
‘벽돌’을 둘러싼 논란은 어떻게 일단락되었을까요?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미술관의 완전한 승리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안드레의 작품은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언론의 유명세를 타면서 이전에는 무심하게 지나쳤을 관객들도 이 작품을 별명인 ‘벽돌’로 알아보는 대표작 중 하나가 되었죠.

우선 영국의 미술관 소장품 관련 협회에서는 이 작품의 가치를 약 200만 파운드(약 33억 원)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칼 안드레가 구리판 100개를 가지런히 바닥에 놓은 작품이 2013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216만 달러(약 28억 원)에 낙찰됐으니, ‘벽돌’의 유명세를 고려하면 터무니없는 가격이 아닙니다.

대구미술관 어미홀에서 전시되고 있는 칼 안드레의 작품 ‘Ferox, New York’(1982). 녹슨 철판 91개를 삼각형 모양으로 바닥에 깔았다. 사진: 대구미술관 제공
게다가 테이트 미술관은 당시 작품을 구매할 때 원래 가격의 절반에 샀으니 알뜰한 소비를 한 셈이죠. 안드레는 1966년 이 작품을 전시한 뒤 갤러리에서 팔리지 않아 벽돌을 다시 공장에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다 작품 사진을 본 테이트의 요청으로 절반 가에 팔기로 하고, 새로 벽돌을 주문해 보내주었죠.

약 40년 사이에 작품 가격은 600만 원에서 33억 원으로, 500배 넘게 뛰었으니 미술관은 본전은 물론 아주 남는 장사를 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요?

인식 예술의 대표 사조, 미니멀리즘
이유는 안드레가 1960년대 미국에서 등장한 ‘미니멀리즘 예술’의 맥락에서 작품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미니멀리즘 예술은 안드레는 물론 도널드 저드, 리처드 세라 등의 작가가 대표적인데요.

미니멀리즘 예술의 맥락에서 벽돌 작품이 담고 있는 의미는 황당하게도 “당신이 보는 대로 판단하라”, 즉 특별한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20세기 인간 사상사의 중요한 단면 중 하나인 ‘현상학’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대구미술관 ‘칼 안드레’ 전시 전경. 사진: 대구미술관 제공
20세기 이전의 사회에서 의미는 신이나 왕이 정해주는 것이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신이 가르치는 대로, 왕이 명령하는 대로 가치가 정해진 세계 속의 부속품이었을 뿐이었죠. 그러나 지금은 누구나 자신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고민하고 결정하며, 이에 따라 삶을 설계해 나가려고 합니다. 이렇게 과거로부터 벗어나 현상을 직시하고 스스로 판단하라고 제안한 것이 바로 현상학입니다.

이런 흐름에 맞물려 미니멀리즘 예술은 ‘예술가의 의도’를 지워버립니다. 즉 예술이 점차 신과 왕을 버리고, 인상주의 예술에서 ‘작가의 눈’을 강조했는데 이제 작가도 없앤 것이죠. 프랑스의 문학 비평가 롤랑 바르트가, 문학 작품은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사람의 반응에서 의미가 생긴다고 말한 것처럼, 미니멀리즘 예술가들도 ‘예술가의 죽음’을 선언한 셈입니다.

대구미술관 ‘칼 안드레’ 전시 전경. 사진: 대구미술관 제공
이렇게 미니멀리즘 예술은 인식의 차원으로 넘어간 현대미술의 중요한 부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공공 미술관들은 미니멀리즘 예술 작품을 한 점씩은 갖고 싶어 하니 가격이 치솟습니다. 이런 칼 안드레의 작품을 대구미술관 어미홀에서 31일까지 볼 수 있습니다. 아무 의미 없는 작품 앞에서 나에겐 뭐가 보이는지, 한 번 만나보세요.

※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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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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