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냉전 승리, 그 후… 반도체 패권 사수하는 美 속내는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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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와 반도체 공생 관계 맺어… 공산주의의 확산 막아 냉전 승리
21세기 패권 전쟁서도 핵심 무기로… “中 반도체 독립 성공 땐 질서 재편”
한국 등 동맹국 압박하며 총력전
◇칩 워, 누가 반도체 전쟁의 최후 승자가 될 것인가/크리스 밀러 지음·노정태 옮김/656쪽·2만8000원·부키

“몇 년 전 학교를 때려 부순 장발에 턱수염을 기른 꼬마들이 아니라, 우리야말로 오늘날 이 세상의 진정한 혁명가다.”

미국 반도체 기업 인텔의 공동 창립자 고든 무어(1929∼2023)가 1973년에 한 말이다. 냉전이 벌어지던 당대 세상을 바꾼 건 “금지를 금지하라”고 했던 ‘68혁명’이 아니라 실리콘밸리의 ‘반도체 혁명’이었다는 얘기다. 요즘은 반도체가 들어가지 않는 가전기기가 별로 없다. 무어의 말대로 반도체는 삶의 방식을 바꿨다.

라이프스타일뿐일까. 미국 터프츠대 국제사 교수인 저자는 반도체가 현대의 세계사를 결정지었다고 본다. 책은 반도체 패권을 놓고 벌어진 세계 각국과 반도체 기업의 전쟁사를 미국의 관점에서 조망했다. 100명이 넘는 과학자와 엔지니어, 정부 관료, 최고경영자(CEO)와의 인터뷰를 통해 반도체가 바꾼 현대의 정치·경제·사회사를 그려냈다.

반도체 기술력은 냉전 시기 미국이 가진 최고의 무기였다. 저자는 반도체 기술의 우위를 선점한 미국이 아시아 국가와 ‘반도체 공생 관계’를 맺어 공산주의의 확산을 저지했다고 분석했다. 1960년대 미국과 일본 정부는 미국 반도체 기업 텍사스인스트루먼트가 일본에 생산기지를 열도록 했다. 대만과 싱가포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이들 국가에 미국 반도체 기업의 해외 설비 공장을 허가하는 방식으로 경제동맹을 구축했다. 이로써 세계 경제의 패권을 장악하고 냉전에서 승리했다는 분석이다.

1980년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왼쪽)와 인텔의 최고경영자(CEO) 앤디 그로브가 악수하는 모습. 아시아 
반도체 기업과의 전쟁에서 패배 위기에 놓였던 인텔은 ‘마이크로프로세서’ 칩을 개발해 마이크로소프트와 동맹을 맺고 
퍼스널컴퓨터(PC) 시장을 지배했다. 부키 제공
1980년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왼쪽)와 인텔의 최고경영자(CEO) 앤디 그로브가 악수하는 모습. 아시아 반도체 기업과의 전쟁에서 패배 위기에 놓였던 인텔은 ‘마이크로프로세서’ 칩을 개발해 마이크로소프트와 동맹을 맺고 퍼스널컴퓨터(PC) 시장을 지배했다. 부키 제공
미국은 이후에도 반도체 패권을 쥐기 위해 총력전을 펼쳐 왔다. 1980년대 일본 정부는 자국 반도체 기업에 막대한 보조금을 지원하고 저리 대출을 내주며 지원했다. 일본의 하이테크 산업이 미국을 앞지르자 미국 국방부는 즉각 ‘특별대책본부’를 꾸렸다. 반도체 산업의 위기를 곧 국가 위기로 인식하고 대응에 나선 것. 결국 1986년 미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메모리 칩 수출 쿼터’를 강제해 미국에서 판매되는 일본산 칩의 수량을 제한했다. 1980년대 인텔을 포함한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이 후발 주자인 삼성에 투자한 이유 역시 일본의 메모리 칩 시장 점유율을 약화시키기 위해서였다.

21세기 반도체 전쟁은 중국과 벌이고 있다. 2020년 미국 상무부는 중국의 정보기술(IT) 대기업 화웨이를 겨냥한 ‘수출 통제 명단’을 발표했다. 화웨이가 미국 기술이 이용된 고성능 컴퓨터 칩을 구입하지 못하도록 수출 자체를 막아버린 것. 이에 맞선 중국은 ‘반도체 독립’을 위해 외국의 반도체 제조사를 인수하고, 자국 기업에 막대한 보조금을 지원하고 있다. 저자는 “중국의 반도체 독립이 성공한다면 세계 경제를 다시 만들고 군사력의 균형을 재설정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반도체 산업이 미중 간 헤게모니 전쟁의 최전방으로 변한 것이다.

애플의 최고경영자(CEO) 스티브 
잡스(왼쪽)가 생전 인텔의 CEO 폴 오텔리니와 대화하는 모습. 인텔은 “모바일 폰을 위한 칩을 만들어 달라”는 애플의 제안을 
거절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훗날 오텔리니는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며 자신의 오판을 인정했다. ‘칩 워…’의 저자는 “반도체 
전쟁에서 이기는 전략은 시장의 흐름을 읽고 세계를 선도하는 기술 혁신을 이뤄내는 것”이라고 했다. 위키미디어
애플의 최고경영자(CEO) 스티브 잡스(왼쪽)가 생전 인텔의 CEO 폴 오텔리니와 대화하는 모습. 인텔은 “모바일 폰을 위한 칩을 만들어 달라”는 애플의 제안을 거절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훗날 오텔리니는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며 자신의 오판을 인정했다. ‘칩 워…’의 저자는 “반도체 전쟁에서 이기는 전략은 시장의 흐름을 읽고 세계를 선도하는 기술 혁신을 이뤄내는 것”이라고 했다. 위키미디어
최근에는 미국이 중국 현지에 있는 우리 반도체 기업의 생산 공정 업그레이드와 첨단 장비 도입마저 규제하려는 상황이다. 한국의 생존 전략은 무엇일까.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국의 반도체 기업이 세계 어떤 시장보다 중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며 “중국이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기술 격차를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얼핏 맞는 말 같지만 결국 한국은 피해를 감수하고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려는 미국의 시도에 동참하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야말로 총력전이 벌어지고 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냉전 승리#반도체 패권#반도체 공생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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