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의 배신 [고양이 눈썹 No.41]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0월 22일 21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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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022년 9월


▽“현대의 시간관리 문화에서는 정원에 앉아 명상에 빠지는 것은 완전히 시간낭비라고 생각한다. 만약 뉴턴이 요즘의 현대 기업에서 일하면서 이런 모습을 보였다면 아마도 인사과에서 정리해고 대상자로 통보받았을지도 모른다. 생전에 뉴턴이 ‘오후 5시: 정원에 착석, 낙하 물체(사과) 고찰’이라고 업무일지에 적었어야 할까? 설마 뉴턴이 이러한 업무일지를 작성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 스웨덴의 뇌 과학자 앤드류 스마트의 책 ‘뇌의 배신’(2014) 중에서

▽뇌 과학과 행동경제학 등이 발전하며 ‘상식의 대반전’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연이어 발표되고 인정받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저 호르몬에 지배되는 단순한 동물인가?’ ‘인간은 요행이나 바라야 하나?’ 라는 의구심마저 들게 해 주니까요. 그야말로 ‘팩폭’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배신’하는 상식의 대반전을 몇 개만 살펴보시지요. 속고만 살았다는 기분도 듭니다.

① 뇌의 배신

사람은 아무 일도 안하고 ‘멍’ 때리거나, 빈둥댈 때 가장 창의적이 된다는 것도 그렇죠. 게으름은 농경사회와 근대 산업사회에선 기피해야 할 인성이었습니다.

뇌 과학 이전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들도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듯 합니다. 그런데 멍 때리고 있으라고 하면 좀 민망하니 이것을 ‘명상’이라고 했던 것 같아요. 멍 때리기나 명상이나 모두 무념무상 상태, 즉 무아지경 상태인 건 매한가지죠.

2022년 6월
2022년 6월


제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교장선생님이 매주 금요일 오전에 1시간씩 ‘명상의 시간’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커튼을 쳐서 교실을 어둑하게 하고 스피커를 통해 잔잔한 음악과 함께 느끼한 목소리의 성우가 격언을 읽어주는 시간이었습니다. 모두 눈을 감고 있어야 했죠. 아이들은 ‘몽상의 시간’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이렇게 1시간을 졸고 나면 뭘 들었는지는 기억 안 나지만 피로도 좀 풀리고 개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뇌의 상태가 ‘디폴트 모드’ 일 때 좋은 아이디어가 많이 나온다는 건 이제 상식이 됐습니다. 필스상 수상자 허준이 교수도 기자간담회에서 본인은 하루 3시간만 연구에 매진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노닥거리거나 아이들과 놀아준다고 했습니다.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20707/114330163/1) 허 교수의 숱한 수학적 직관도 이럴 때 나왔을 겁니다.

현자들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양자역학을 연구 중이던 리처드 파인만 교수(1918년~1988년, 1965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가 설거지 알바 학생들이 접시를 던지는 것을 보고 전자 이동에 대한 직관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유명합니다. 구내식당에서 다른 교수들과 노닥거리지 않았다면 못 보았을 장면이죠.

연구소에선 쓸데없이 수다를 떠는 연구원들이 연구 성과가 좋다는 설도 있습니다. 특히 환경미화 직원 등 동료 연구원이 아닌 사람들과 틈만 나면 잡담을 나누는 연구원들이 그렇다는 군요. 다른 세계의 사람들과 정신적으로 이종교배를 하는 것이죠.

2021년 9월
2021년 9월


한 때 직장인을 ‘똑부’ ‘똑게’ ‘멍부’ ‘멍게’ 등 4가지로 분류하는 놀이가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똑부’ 아니면 ‘똑게’가 되기를 원하겠지만, 위의 논리로 보면 4가지 유형 중 ‘똑부’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일을 적게 하거나 잘 놀거나 게으르게 무념무상 상태로 있는 시간이 많아야 똑똑해 지니까요. 부지런해도 똑똑할 수 있다는 주장은 애초에 누가 만든 것일까요?

Annals of Improbable Research (황당 연구 회보) 홈페이지
Annals of Improbable Research (황당 연구 회보) 홈페이지


②성공 공식의 배신


‘괴짜들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이그 노벨상(Ig Nobel Prize)의 2022년 경제학상은 이탈리아 학자들이 받았습니다. 이 상은 미국 하버드대가 격월로 발간하는 잡지 ‘황당 연구 회보’가 노벨상을 패러디해 1991년 만들었고 올해로 32회째입니다. 진지하고 엄숙한 노벨상과 달리 패러디 정신을 살려 ‘웃어라, 그리고 생각하라(Laugh and then think)’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있습니다.

알레산드로 플루치노 교수 등 이탈리아 행동경제학자들은 ‘재능 vs 행운 : 성공과 실패에서 무작위의 역할’이란 논문을 통해 성공은 재능보다 행운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정량화·수량화했다고 밝힙니다(제가 논문을 요약본만 봤기 때문에 어떤 과정으로 수량화했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이들은 “가장 재능 있는 사람들이 성공의 최고봉에 도달하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평균적인 수준의 재능이 있지만 운이 좋은 사람이 더 큰 성공을 거둔다”고 주장합니다. 즉 성공 수준만을 기준으로 공로를 평가하면, 단순히 타인보다 운이 좋았을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 명예나 공적 자원이 과도하게 투입될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강조합니다. 능력주의를 회의하는 것이죠.

사진기자들도 우스개 소리로 ‘운칠기삼(運七技三)’이란 말을 자주 합니다. 사진기자들 중에 사진을 잘 못 찍거나 카메라를 잘 못 다루는 이는 없죠. 그런데 같은 장소에서라도 누구는 특종을 하고 누구는 ‘물을 먹’습니다. 찍는 위치도 그러하고 순간적으로 벌어지는 사건이 많기 때문이죠. 저도 바로 옆에 있던 사진기자들에게 물을 꽤나 먹었는데요… 앞으로는 ‘운이 없어서 그랬다’라고 위안 삼아 보겠습니다.

2021년 6월
2021년 6월


자기계발서 등도 대부분 성공한 사람들의 과정을 ‘성공의 공식’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죠. ‘1만 시간의 법칙’으로 유명한 책 ‘아웃라이어’(2009년)에서 저자 맬컴 그래드웰도 운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물론 재능을 갖추고 노력을 해야 행운이 왔을 때 그 기회를 잡겠지만요.

주변에 사업적으로 성공을 어느 정도 이루신 분들 중 상당수가 점집을 자주 가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늘 냉철하고 합리적이며 스마트하신 분이라 봐왔는데 징크스도 많고 미신을 믿고 심지어 부적까지 들고 다니시는 것을 보고 웃곤 합니다. 그런데, 역시 사업가들이라 매출이 행운과 직결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아시고 그러시는 게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2020년 1월
2020년 1월


③진심·진실·진정성의 배신

“진정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국민타자’ 이승엽의 좌우명으로 유명해진 격언입니다. 진실한 마음(진심)과 진정성에 대한 격언이라 저도 좋아하는 문구였는데요, 오히려 이런 격언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는 분들이 굉장히 많다는 얘기를 듣고 조금 놀랐습니다.

정신과 의사나 상담사들에 의하면, “내 실패는 내가 진정성 있게 노력하지 않아서”라며 자책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합니다. 즉 저런 격언의 함정은 실패한 사람들을 노력하지 않은 것으로 몰아붙일 수 있다는 것이죠. 경험 많은 정신과 의사들은 ‘배반하는 노력’이 훨씬 많다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스스로 진실 되게 살면 언젠가 사람들이 알아주겠지…”라는 마음을 먹었다면 접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오해로 점철돼 있고 내 진심은 나만 아는 것이죠. 표현을 정말 기술적으로 잘 하지 못하면요.

2021년 8월
2021년 8월


‘진정성’도 무리한 요구일 때가 많습니다. 신당역 살인사건의 범인도 재판부에 여러 차례 ‘진심으로 뉘우치는’ 반성문을 제출했습니다. 진정성과 성찰을 요구하는 행위는 상대방을 압박해 심리를 지배하려는 꼰대스러운 짓입니다. 범인은 그걸 역이용한 것 같고요. 진정성·진실·진심·반성·성찰은 수량화 정량화하기 불가능합니다. 실체도 딱히 없습니다. 가족이나 친구들, 동료들에게 진정성을 요구하지 맙시다!

▽배신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배신을 한 번 당하면 ‘현타’가 쉽게 오기도 하고 나아가 세계관도 바뀝니다.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고 사실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가게 해 줄 수도 있습니다. 상식과 인식에 대한 새로운 지평도 열어줍니다. 발등은 믿는 도끼에 찍혀야 제 맛이니까요.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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