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0일 출간된 박찬욱 감독 영화 ‘아가씨’(2016년)의 스틸사진집 ‘아가씨의 순간들’(플레인아카이브). 플레인아카이브가 그간 냈던 사진집은 풀 컬러에 양장제본이라도 4만 원을 넘지 않았다. 이전 최고가는 ‘리틀 포레스트 사진집’(2021년·3만7000원).
하지만 13만 원이라는 고가에도 불구하고 영화 ‘아가씨’를 유형의 추억으로 간직하고자 하는 팬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텀블벅에서 약 2500권이 선주문 돼 3억 원이 모였다. 온라인 서점 판매량을 합치면 책은 2800권 가량 팔렸다.
전무후무한 책을 선보인 플레인아카이브는 블루레이, 각본집 등 영화 굿즈를 제작하는 회사다. 영화광들 사이에서는 감각적인 패키지 디자인과 기획력으로 ‘장인’이란 정평이 나며 박찬욱 봉준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등 거장들이 믿고 맡기는 회사가 됐다.
2013년 블루레이 제작사로 문을 연 플레인아카이브는 ‘멜랑콜리아’(2011년)를 시작으로 ‘돼지의 왕’(2011년) ‘들개’(2013년) ‘올드보이’(2003년) ‘캐롤’(2015년) 등 총 75개의 블루레이를 냈다. 분야를 넓혀 봉 감독의 ‘기생충’(2019년) 각본집과 스토리보드북, 히로카즈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년),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년), ‘어느 가족’(2018년) 각본집도 출간했다. 8일 서울 마포구 카페에서 플레인아카이브 백준오 대표(42)를 만났다.
●3년 걸려 만든 ‘아가씨의 순간들’
‘아가씨의 순간들’을 만드는 과정은 어떤 출판사도 간 적 없는 길이었다. 김태리, 김민희가 주연을 맡은 ‘아가씨’는 팬덤이 공고한 영화인데다 20년 업력의 베테랑인 이재혁 스틸작가의 사진을 담은 사진집이었기에 무엇 하나 허투루 할 수 없었다.
가장 신경 쓴 건 북클로스(Bookcloth·책 표지를 싸는 천)였다. 영화에서 기모노가 주인공 히데코(김민희)의 주된 의상인 만큼 기모노 느낌을 갖는 북클로스를 원했다. 국내 업체 중에선 맘에 드는 색상과 소재의 북클로스를 찾을 수 없어 수소문한 끝에 미국과 네덜란드 업체에서 천을 수입했다. 표지에 들어가는 글자를 ‘박 인쇄’(글자에 열과 압력을 가하는 방식)하는 과정에서는 깨알같이 작은 글씨도 뭉개지지 않게 하려고 테스트에만 북클로스 300만 원 어치를 썼다.
“‘아가씨’의 블루레이 제작을 맡으면서 이 작가로부터 약 1만 장의 스틸사진들을 받았어요. 사진들을 쭉 보는데 ‘이 좋은 걸 우리만 봐도 되나’ 하는 마음이 들어 사진집 기획을 시작했어요. 최대한 많은 사진을 싣는 게 목표였어요. 책의 분량 때문에 제책 과정이 쉽지 않아 절반 정도 내용을 덜어내자는 제본소 제안도 있었지만, 분량과 만듦새 모두 타협할 수 없는 부분들을 지키면서 완성도 높은 책을 만들기 위한 여정이 3년이 돼 버렸네요.”
영화 제작 기간보다 더 오랜 기간동안 굿즈를 만드는 정성과 집요함은 영화감독들에게도 깊게 각인됐다. 블루레이 수집 마니아인 봉준호 감독도 그 중 하나다. 그는 틸다 스윈튼 주연의 ‘아이 엠 러브’ 블루레이를 처음 접한 뒤 플레인아카이브가 만드는 블루레이를 눈 여겨 봤다. 영화 ‘마더’(2009년) 10주년 기념 사진집 ‘메모리즈 오브 마더’(2019년) 제작을 백 대표에게 맡겼다. 그 시기와 맞물려 ‘기생충’의 각본집과 스토리보드북 기획도 제안했다. 백 대표는 기생충이 처음 공개된 칸 국제영화제 전이었던 2019년 초부터 책 출간을 기획했다.
“기생충 투자배급사였던 CJ ENM에 여러 출판사들로부터 제안이 들어왔는데 봉 감독님이 책에 바라는 여러 의견을 적극 수용한 저희의 의지를 잘 봐주셨어요. 뜻이 맞았기에 서로 적극적으로 의견을 나누면서 책을 만들었어요. 스토리보드북 표지를 실사가 아닌 일러스트로 한 건 만화를 좋아하는 봉 감독님 취향을 고려해 최대한 만화책 느낌을 내기 위함이었어요. 봉 감독님이 스토리보드북을 보고 ”만화가로 데뷔한 것 같다“고 하셨죠.”
●‘브로커’ 각본집·스토리보드북도 준비
올해 칸 국제영화제에서 송강호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긴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 각본집과 스토리보드북도 9월 출간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나온 적 없는 그의 각본집 3권을 내며 신뢰를 쌓은 덕이다. 히로카즈 감독의 스토리보드북이 별도로 출간되는 건 한국과 일본을 통틀어 처음이다. 브로커의 크랭크인 소식이 들리자마자 백 대표가 배급사인 CJ ENM에 각본집과 스토리보드북 출간을 제안했다.
“히로카즈 감독도 봉 감독처럼 콘티를 직접 그리고 대사도 직접 손으로 씁니다. 내용 이해가 쉽게 일본어 대사를 지우고 한국어로 덮을까 고민하다가 손 글씨를 살리고 한국어 번역은 주석으로 달기로 했어요. 창작자의 머리에서 나온 최초의 기록을 보여주기 위해 원본을 그대로 살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히로카즈 감독은 콘티를 그릴 때 세로방향만 고수하지 않고 자유롭게 종이를 사용하는 스타일이라 가로 판형 스토리보드북으로 기획했습니다.”
‘영화를 간직하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
소셜미디어에 적힌 플레인아카이브 소개다. 그 아름다움을 위해 백 대표는 장인정신으로 느리지만 타협 없이 간다. 3~4년에 걸쳐 영화 굿즈를 제작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장건재 감독의 ‘한여름의 판타지아’(2014년) 블루레이 제작에는 꼬박 4년이 걸렸다. 장 감독과 배우 김새벽, 이와세 료 세 사람과 일본 로케이션인 나라현 고조시를 직접 방문해 부가영상을 제작했다. 백 대표가 가장 애착을 갖는 자사 블루레이 ‘올드보이’에는 3년을 매달렸다. 올드보이 특별판 블루레이용으로 기획된 다큐멘터리 ‘올드 데이즈’를 만들기 위해 감독, 배우들과 차를 타고 촬영지를 돌아다니며 씨네마 카메라로 인터뷰를 찍었고,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그해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됐다.
“큰 회사라면 못하는 일이죠. 결정권자가 많고 효율적으로 판단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탈락되는 디테일들이 있거든요. 저희는 여력도 없고 직원도 부족하지만 디테일 하나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이 있어요. 그러다보니 출시가 지연되는 건 고객들에게 정말 죄송해요. 그래도 제품이 나왔을 때 ‘이거 만들려고 그렇게 오래 걸렸구나’란 말을 듣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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