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질없는 일 되풀이도, 탐욕에 희생되는 것도, 나와 같으니 서글프구나”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입력 2021-05-13 03:00수정 2021-05-13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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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를 영화로 읊다]〈16〉꿀벌의 노래
영화 ‘벌집의 정령’에서 가장인 페르난도는 벌의 생태를 보며 벌과 같은 자신의 처지에 서글퍼한다. 보카치오 제공
한시는 개개의 사물을 노래하며 대상에 대한 다양한 이미지를 만들어왔다. 그중 벌은 나비와 달리 한시에서 자주 읊은 대상은 아니었다. 조선시대 이행(李荇·1478∼1534)은 ‘꿀벌의 노래(蜜蜂歌)’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마지막 구절은 굶주린 벌을 항아리에 거두어 기른 승려에게 벌이 보답으로 항아리 가득 꿀을 쳐 놓고 떠나간 일을 가리킨다. 시인은 벌에 대한 양면적 의식을 담았다. 하나는 여왕벌을 향한 일벌의 충성심에 대한 경탄이고, 다른 하나는 열심히 꿀을 모았지만 인간의 탐욕에 희생당하는 벌에 대한 동정심이다. 당나라 시인 나은(羅隱)이 노력의 대가를 받지 못하고 수탈당하는 벌의 이미지에 주목한 바 있다.(‘蜂’)

이 시를 쓸 당시 이행은 생모인 폐비 윤씨를 복권시키려는 연산군에게 반대한 죄로 유배 중이었다. 거제도에서 관노가 돼 양을 치며 살았는데,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전통사회에서 벌은 긍정적인 이미지만 있던 건 아니다. ‘시경’에선 소인의 상징으로 쓰인 바 있다.(시경 주송·周頌 소비·小毖) 이 때문에 시인이 주목한 ‘억울하게 희생된 충성스러운 벌’에서 시대의 징후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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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 뒤 지식인의 트라우마를 표현한 빅토르 에리세 감독의 영화 ‘벌집의 정령’(1973년)에도 벌이 나온다. 가장인 페르난도는 양봉업을 한다. 책이 빼곡한 서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그는 프랑코 반군의 승리로 세상을 등진 지식인으로 보인다. 카메라는 벌집 모양 창문을 배경으로 그를 포착해서, 그 역시 벌과 다름없음을 넌지시 드러낸다. 그는 벌통 속에서 부질없는 움직임을 반복하는 벌을 보며 ‘죽음의 안식과도 같은 삶’이라고 되뇐다.

영화와 한시 모두 벌을 소재로 삼았지만 결코 벌 이야기만은 아니다. 영화에선 누군가에게 선동당해 무의미한 반복만 하는 벌의 일상을 통해 정치적 열패감을 암시한다. 한시에선 전통적 벌의 이미지 중 충성심을 강조하는 한편 탐욕으로 인한 희생도 지적한다. 폭군과 독재자의 압제 아래 지식인이 겪는 좌절감이 각각의 방식으로 표현된다. 벌에게 정신적 상처를 투사하고 벌과 같은 자신의 처지에 서글퍼진 것이다.

벌들이 붕붕거리며 날아다니는 이 봄,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생각해본다.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한시#꿀벌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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