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미안하다는데 진심이 안 느껴지는 까닭은?

박선희 기자 입력 2020-08-15 03:00수정 2020-08-1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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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죄 없는 사과 사회/숀 오마라, 게리 쿠퍼 지음·엄창호 옮김/392쪽·1만7000원·미래의창
유튜버, 연예인, 정치인, 기업…문제가 생기면 일단 고개 숙이고 사과한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반성과 책임은 없고 핑계와 회피로 가득 찬 사과가 대다수다. 2018년 페이스북의 개인정보 유출에 대해 미국 워싱턴 의회에서 사과하는 마크 저커버그. 워싱턴=AP 뉴시스
2010년 페이스북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마크 저커버그 최고경영자(CEO)는 “사용자 통제권을 축소해 편의성을 높이려 했던 예상이 빗나갔습니다”라고 말했다. 사과인지 아닌지 알쏭달쏭한 말이다. 사실 ‘예상이 빗나갔다’는 말은 여러 기업이 공개 사과에서 자주 쓰는 멘트다. 도브, 펩시 등은 인종이나 성차별로 문제가 된 광고에 대해 “우리 예상이 빗나갔다”고 핑계를 댔다. 미안한 척하면서 책임은 회피하는 방법이다. 실제 페이스북에선 2018년 또 다른 개인정보 스캔들이 터졌다.

현대사회에는 의미가 상실된 사과들이 도처에 넘친다. 많은 조직이 온갖 사소한 사과는 남발하면서도 정작 제대로 된 진짜 사과에는 실패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인 두 저자는 이처럼 공분을 자아낸 이상한 사과를 유형별로 분류하고 그 문제점을 진단한다.

저자들은 일단 ‘익명의 사과’가 나온다는 건 일이 적당히 사그라들기만을 바란다는 뜻이라고 비판한다. 제대로 된 사과의 기본은 책임 있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고경영자(CEO)가 나섰다 한들 엉뚱한 소리만 해선 곤란하다. 전문용어만 잔뜩 늘어놓거나 책임을 회피하며 복잡하게 사과하는 것, 다른 핑계를 줄줄이 대는 것 등이 그렇다.

유명한 양자물리학자인 슈뢰딩거가 양자물리학을 설명하면서 ‘고양이는 죽어 있는 동시에 살아 있을 수 있다’고 한 것과 같은 화법의 사과는 현실에선 빵점이다. 미국의 신용정보업체 에퀴팩스는 데이터 유출로 1억여 명에게 피해를 준 뒤 “데이터를 관리하고 보호하는 선두주자라고 자부한다”고 말했고, KFC 대변인은 주방에 쥐가 드나드는 게 알려졌을 때 “위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안하긴 한데, 결백하단 것. 캐나다의 한 병원은 검사 오류로 인한 마약 양성 반응 때문에 두 자녀가 강제 입양된 여성에게 이렇게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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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마더리스크 약물검사 실험실에서 이뤄진 일련의 검사 업무가 현재 우리 병원의 우수성에 못 미치는 결과를 보여준 것에 대해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사과의 탈’을 쓴 면피와 회피는 실망을 넘어 공분을 유발함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데 오늘날 사과의 또 다른 문제점은 분노를 부채질하는 소셜미디어 때문에 엉뚱한 데까지 사과를 강요하는 문화가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마크스앤드스펜서 매장의 디스플레이가 성 고정관념을 강화하니 사과하란 요구가 빗발쳤다. 신발 종류가 다양하지 않아 선택에 제한을 느꼈다는 소비자에게 공개 사과한 업체 등의 사례가 그렇다. 이런 분위기는 사소한 문제에는 얄팍한 사과를 남발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사안 앞에선 책임을 회피하게 한다.

참회, 시인, 책임, 간명성이 있는 진정한 사과가 나오려면 가짜 사과는 질타하고, 제대로 된 사과엔 적극 보상해줘야 한다. 우리 사회는 문제가 터지면 여론이 들끓다가도 금방 잊어버린다. ‘이 순간만 모면하자’는 면피용 사과 문화에 일조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함께 고민해볼 문제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죄 없는 사과 사회#숀 오마라#게리 쿠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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