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조선인은 해부학적으로 야만” 해골 도둑으로 몰아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27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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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6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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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실에 있던 두개골이 없어졌다. 범인 누구야? 당장 나와!”

“그런 일 없습니다.”

“뭐야? 너희들 중에서 가져간 게 틀림없어. 조선인들은 해부학적으로 야만에 가깝잖아. 너희 역사를 보더라도 그렇고!”

현 서울대 의대의 전신인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1921년 5월 27일 일본인 교수 쿠보 타케시와 조선 학생들 사이에 오간 대화입니다. 아니, 쿠보의 일방적인 망언이라고 하는 게 옳겠네요.

1921년 6월 경성의전 조선인 학생 동맹휴학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쿠보 다케시 교수. 그는 조선민족이 열등함을 증명하기 위해 체질인류학, 해부학 지식을 악용했다.
1921년 6월 경성의전 조선인 학생 동맹휴학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쿠보 다케시 교수. 그는 조선민족이 열등함을 증명하기 위해 체질인류학, 해부학 지식을 악용했다.
그 전날인 26일, 쿠보의 1학년 해부학 수업이 끝난 뒤 학생 10명이 해부실의 해골을 견학합니다. 조선인 6명, 일본인 4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쿠보가 두개골이 사라졌다며 다짜고짜 조선 학생들을 도둑으로 몰고 민족 전체를 모욕한 겁니다. 분개한 학생들은 평소 우리 민족이 열등하다고 주장해 식민통치를 옹호한 쿠보의 막말을 두고 볼 수 없다며 대표를 뽑아 따졌지만 쿠보는 되레 화를 내며 쫓아냈습니다. 6월 1일에는 2, 3, 4학년 조선 학생들까지 가세해 교무주임에게 △쿠보는 조선민족이 인종해부학적, 역사적으로 열등한 점을 확증을 들어 강의할 것 △국민성을 모욕한 쿠보의 가르침은 받을 수 없으니 다른 교수를 모셔올 것을 요구했습니다. 48시간 내에 조치가 없으면 동맹휴학도 불사하겠다는 뜻도 전했습니다.

이틀 뒤인 3일, 쿠보는 조선 학생들 앞에 나타났지만 변명에 급급합니다. “나는 원래 흥분을 잘 하기 때문에 탈선이 없었다고 보증할 수 없으며, 만약 모욕적 언사가 있었다면 본뜻이 아니니까 취소하노라.” 분개한 조선인 학생 194명 전원은 다음날 동맹휴학에 돌입했고, 학교 측은 쿠보를 두둔하며 강경대응에 나섭니다. 교무주임은 6일 조선 학생들을 소집해 ‘쿠보의 학술연구를 다수의 힘으로 배척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시가 교장의 훈계를 대독합니다. 이어 7일 동맹휴학을 주도한 9명은 퇴학, 나머지 185명은 무기정학에 처하는 초강수를 두죠.

이쯤 되니 조선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당시 이런저런 이유로 동맹휴학이 잦긴 했지만 최고학부인 경성의전 학생들이 민족성 모욕을 이유로 집단행동에 나섰고, 학교는 이들을 모조리 쓸어버렸으니까요. 보다 못한 학부형과 졸업생들이 중재에 나섰고, 사이토 총독도 관심을 보이며 “며칠 안으로 해결 지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원죄를 지은 쿠보는 눈물을 보이며 “말을 삼가며 오해가 풀리기를 기다리겠다”고 사죄했습니다. 결국 학교 측이 퇴학을 가(假)입학으로 완화하고 무기정학을 해제하면서 학생들은 6월 28일 등교합니다.

1937년 무렵의 경성의학전문학교 건물. 1916년 설립된 경성의전은 1918년부터 일본인 학생들을 ‘특별과’로 받으면서 두 민족간 갈등이 왕왕 일어났다.
1937년 무렵의 경성의학전문학교 건물. 1916년 설립된 경성의전은 1918년부터 일본인 학생들을 ‘특별과’로 받으면서 두 민족간 갈등이 왕왕 일어났다.
동아일보는 6월 3일자 ‘의전 사제의 대 분규’에서 초기상황을 자세히 보도한 뒤 거의 매일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뤘습니다. 단순히 사태의 추이를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학생들과 학교 측은 물론 학부형, 졸업생, 총독부 인사들을 두루 취재하며 사태 해결을 도왔습니다. 그러면서도 쿠보 교수와 시가 교장의 오만은 서릿발처럼 비판했죠.

8, 9일자 연속 사설 ‘의전의 휴교와 구보 박사의 망언’에서는 “조선인은 표정과 근육이 발달되지 못했고, 교근(咬筋·음식물을 씹을 때 쓰이는 근육)이 발달해 야만”이라는 쿠보의 학설을 조목조목 비판했습니다. 7월 6일자 ‘횡설수설’은 “노동자가 자본가를 상대로 싸우듯 하지 말고 학리에는 학리로 대항하라”고 조선인 학생들을 훈계한 시가 교장에 “‘선생의 주먹에 학생도 주먹으로 대항하라’고 해도 찬성할 것인가”라고 다그쳤습니다.

희대의 경성의전 동맹휴학은 이렇게 일단락됐지만 민족차별이 여전한 한 언제라도 다시 재발할 수 있는 불씨를 안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2년 뒤인 1923년 7월에도 이 학교에서는 일본인 학생이 조선 학생과 말다툼을 하다 “국민성이 다르다”, “야만이다”라고 폭언을 해 큰 편싸움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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