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청희의 젠틀맨 드라이버]정교한 아날로그 시계, 최첨단 자동차의 상징이 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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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자동차 산업 발달로 자동차용 크로노그래프 각광
‘시계 있어야 좋은 차’ 통념 생겨
벤츠-IWC, 벤틀리-브라이틀링 등 고급차와 시계 브랜드 간 협력… 특별한 가치 공유할 수 있어

메르세데스-마이바흐 S 600의 대시보드 한가운데에는 IWC의 아날로그 시계가 놓여 있다. 다임러 제공
메르세데스-마이바흐 S 600의 대시보드 한가운데에는 IWC의 아날로그 시계가 놓여 있다. 다임러 제공
자동차와 시계는 많은 남성이 공통적으로 관심을 갖는 품목이다. 자동차와 시계 모두 디지털화하며 최근에는 서로 다른 영역의 물건으로 취급받기는 하지만 한때 두 품목은 기계문명을 상징하는 첨단 제품으로 취급받았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며 자동차와 시계는 더 밀접한 관계로 발전했다. 자동차 발달과 더불어 차의 성능이 중요한 가치 기준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차의 속도를 표시하는 속도계는 물론이고 가속성능을 확인할 수 있는 크로노그래프도 고성능 차와 어울리는 아이템으로 각광받았다.

영국 앨프리드 던힐이 처음으로 자동차용 크로노그래프의 특허를 받은 때가 1903년이었다. 1911년에는 스위스 호이어(지금의 태그호이어)가 처음으로 제품화에 성공했다. 이후 자동차에 시계를 다는 것은 새로운 유행이 됐고 자연스럽게 자동차 브랜드와 시계 브랜드는 협력관계로 이어졌다.

시간이 흘러 정밀 가공 기술이 발달하며 크로노미터와 타키미터(속도 측정 기능이 있는 시계)가 손목시계 크기로 작아진 이후에는 자동차 브랜드나 모델 이름을 쓴 손목시계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모터스포츠의 발전도 시계와 자동차 ‘이종’ 간의 결합에 촉매 역할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여러 모터스포츠 장르는 같은 시간에 출발점을 떠난 차들이 결승선을 통과하는 시간, 서로 다른 시간에 출발하더라도 같은 구간을 달린 시간을 측정하는 방식으로 순위를 정한다.

이런 경주 방식에는 정확한 시간 측정 수단이 꼭 필요하다. 촌각을 다투며 경쟁하는 자동차 경주 선수들에게는 크로노미터와 타키미터가 필수품이나 다름없었다. 그 덕분에 유명 자동차 경주 선수가 사용하는 시계는 모터스포츠 팬들에게도 인기를 얻었다.

모터스포츠가 시간과 시계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무대가 되자 시계 브랜드들은 이 시장에 적극 뛰어들었다. 아울러 모터스포츠의 규모가 커지면서 공정한 기록 측정을 위한 계측장비도 필요해졌다. 시계 브랜드로서는 자사 제품의 우수성을 알릴 수 있는 기회였다. 정밀 계측장비를 개발하고 제공하며 차츰 모터스포츠에서 시계 브랜드가 차지하는 부분이 커졌다. 지금도 주요 모터스포츠 이벤트에는 공식 계측 업체로 시계 브랜드가 참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야기를 다시 자동차에 다는 시계로 돌려 보자. 20세기 전반에 걸쳐 자동차에 달린 시계는 상징적 의미가 컸다. 1970년대 들어 쿼츠 시계와 디지털 시계가 등장하며 손목시계가 대중화되기 전까지 차에 달린 시계는 무척 유용했다. 시계가 달려 있어야 좋은 차라는 통념이 생길 정도였다.

일례로 오랫동안 메르세데스벤츠 승용차 계기판에는 두 개의 원형 계기가 같은 크기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하나는 속도계였고 다른 하나는 아날로그 시계였다. 물론 계기판에 커다란 시계가 들어가는 것은 메르세데스벤츠 같은 고급차 브랜드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1970년대 말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현대 포니나 대우 맵시 같은 차들도 속도계와 같은 크기로 아날로그 시계가 계기판에 붙어 있었다.

자동차의 시계가 바늘 대신 숫자가 표시되는 디지털 방식으로 바뀌는 흐름 속에서도 메르세데스벤츠의 계기판에는 오랫동안 아날로그 시계가 남아 있었다. 지금은 메르세데스벤츠도 계기판이 액정 화면으로 바뀌어 한쪽에 숫자로 시간이 표시되지만 대시보드에 작은 아날로그 시계가 달려 나오는 모델도 여전히 많다.

2004년 이후 메르세데스벤츠와 AMG 고급 모델에는 IWC의 시계가 대시보드에 들어가고 있고 IWC는 AMG IWC 에디션 손목시계를 한정판으로 내놓고 있다. 지금은 대시보드에 들어가는 아날로그 시계가 차의 고급스러움을 상징하는 요소처럼 쓰이고 있다. 그러나 시계의 가치는 화려한 겉모습보다는 바늘을 움직이게 하는 메커니즘에 좌우된다.

그래서 고급차 브랜드일수록 정교한 무브먼트를 만들기로 유명한 시계 브랜드와 손잡고 차의 디자인이나 브랜드 이미지와 어울리는 시계를 단다. 그와 더불어 브랜드 간의 협업도 활발하게 이뤄져 지금은 자동차 브랜드나 제품의 디자인과 개념, 이미지를 반영한 손목시계가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

영국 고급 스포츠카 브랜드인 애스턴 마틴과 스위스 시계 브랜드인 예거 르쿨트르도 자동차 회사와 시계 업체의 끈끈한 관계로 널리 알려져 있다. 두 회사가 손을 잡은 것은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거 르쿨트르의 전신인 르쿨트르는 에드몬드 예거와 손잡고 1930년대에 주행거리 기록계와 속도계를 비롯해 애스턴 마틴 차에 들어가는 계기를 공급했다.

애스턴 마틴과 예거 르쿨트르의 협업은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진은 2006년 선보인 애스턴 마틴 예거 르쿨트르 스페셜 에디션.
애스턴 마틴과 예거 르쿨트르의 협업은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진은 2006년 선보인 애스턴 마틴 예거 르쿨트르 스페셜 에디션.
애스턴 마틴이 창립 90주년을 맞은 2003년 두 회사는 다시 협력관계를 시작했고 2004년 두 회사는 70주년을 기념해 AMVOX1을 내놓았다. 남성용 손목시계인 AMVOX1은 모두 1650개만 한정생산됐다. 이후 2016년 계약이 끝날 때까지 예거 르쿨트르는 애스턴 마틴을 위한 AMVOX 라인업을 여러 차례 내놓았다.

영국 고급차 브랜드 벤틀리와 스위스 시계 브랜드 브라이틀링은 가장 적극적으로 협업하며 시너지를 만들어낸 사례다. 2002년 벤틀리 컨티넨탈 GT 출시에 맞춰 처음 협업의 결실을 맺은 뒤 브라이틀링은 벤틀리 차의 디자인과 잘 어우러지는 ‘브라이틀링 포 벤틀리’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이 제품들은 벤틀리의 맞춤 제작 방식과 비슷하다. 벤틀리 구매자들은 자신의 취향에 따라 시계의 세부 요소를 다르게 주문할 수 있다. 다이얼 색은 벤틀리 기본 차체색 중 하나로 선택할 수 있다. 벤틀리의 첫 SUV인 벤테이가에도 두 브랜드 간 협업의 결과물이 들어간다. 2017년 출시된 벤테이가 멀리너에는 맞춤 제작되는 멀리너 투르비옹 바이 브라이틀링을 선택해 넣을 수 있다. 이 시계는 가장 복잡한 구조로 작동하는 투르비옹을 자동차에 달았을 뿐 아니라 차 안에서 자동으로 와인딩하는 독특한 기술이 쓰여 화제가 됐다.

랜드로버도 2017년 새 모델인 레인지 로버 벨라 출시를 기념해 스위스 시계 브랜드 제니스와 협업해 제니스 크로노마스터 엘 프리메로 레인지 로버 벨라 스페셜 에디션을 선보였다. 제니스는 레인지 로버가 탄생한 1970년 엘 프리메로라는 이름으로 세계 최초의 셀프 와인딩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를 개발해 내놓은 바 있다. 이와 같은 연결 고리를 바탕으로 두 회사는 디자인과 엔지니어링 개발자들의 공동작업을 통해 신제품 출시 기념 한정판 시계를 출시했다.

고급차일수록 소유자의 개성을 반영할 수 있는 폭이 넓고 숙련된 장인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요소가 많다. 그런 차에서는 대량생산되는 차에서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함과 가치를 느낄 수 있다. 시계도 마찬가지여서 복잡한 부품들을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가공해 만든 제품일수록 가치가 높다.

비슷한 과정을 통해 높은 가치를 만들어내는 서로 다른 두 장르의 협업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큰 시너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한 사람이 타는 차와 그가 차고 있는 손목시계의 브랜드가 잘 어울리는지 살펴보는 것으로 그 사람의 안목을 알 수 있는 시대. 자동차와 시계 브랜드의 협업 덕분에 이제는 차에 어울리는 시계를 고를 때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시계#자동차 시계#류청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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