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인생은 때로 낯선 운명을 받아들이는 일

  • 동아일보

◇내 마음의 낯섦/오르한 파묵 지음·이난아 옮김/652쪽·1만6800원·민음사

소설 ‘내 마음의 낯섦’의 배경이 되는 도시 이스탄불. 이 책은 이스탄불의 급격한 도시화 속에서 전통 음료 보자를 팔며 살아가는 메블루트의 삶과 사랑을 다룬 작품이다. 동아일보DB
소설 ‘내 마음의 낯섦’의 배경이 되는 도시 이스탄불. 이 책은 이스탄불의 급격한 도시화 속에서 전통 음료 보자를 팔며 살아가는 메블루트의 삶과 사랑을 다룬 작품이다. 동아일보DB
“나는 나 자신을 설명할 때 이스탄불을, 이스탄불을 설명할 때 나 자신을 설명한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저자 오르한 파묵(사진)은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이 나고 자란 터키 이스탄불에 대입해 말할 정도로 고향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그의 아홉 번째 신작 ‘내 마음의 낯섦(A Strangeness in My Mind)’의 배경 역시 이스탄불이다. 작가는 열두 살에 시골을 떠나 이스탄불로 이주한 주인공 메블루트의 생애를 따라 동서양의 문화와 사상, 종교, 계급이 충돌한 이스탄불의 40여 년 현대사를 씨줄과 날실처럼 엮었다.

1968년 이스탄불은 과거 서울처럼 돈을 벌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이주민들이 넘쳐난다. 시골 아나톨리아에 살던 주인공 메블루트와 그의 아버지 카라타쉬도 그중 하나였다. 그들은 이스탄불 외곽 무허가촌인 게제콘두에 자리를 잡고, 거리에서 터키 전통 음료인 보자를 팔며 생계를 이어간다.

메블루트 인생을 180도 바꾼 건 친척 코르쿠트의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본 아름다운 소녀 라이하였다. 첫눈에 소녀에게 반한 메블루트는 이후 3년간 열렬히 구애 편지를 보낸다. 코르쿠트의 동생이자 메블루트의 동갑내기 사촌 쉴레이만이 이들의 편지를 대신 전달하며 사랑의 연결고리 역할을 자처한다. 장인에게 거액의 지참금을 줄 여력이 없던 메블루트는 한밤중 쉴레이만의 도움을 받아 라이하와 도망을 친다. 끝내 가까운 거리에서 라이하의 얼굴을 온전히 바라보게 된 순간, 메블루트는 깨닫는다. 그가 잊지 못한 첫사랑의 눈은 라이하가 아님을…. 그가 진짜 사랑한 소녀는 라이하의 한 살 터울 동생 사미하였음을 말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는 잠시 혼란에 빠진다. “메블루트는 지금 자신이 빠져들고 있는 낯선 침묵이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리라는 걸 느꼈다.”

메블루트는 꼬여버린 상황에 대해 남을 탓하기보단, 그저 삶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쪽을 선택한다. 오히려 잠든 라이하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잘 때 책임감을 느끼고 행복해지려 노력한다. 메블루트는 라이하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살아간다.

운명의 장난은 훗날 쉴레이만의 고백에서 밝혀진다. 쉴레이만은 라이하에게 자신이 사미하를 맘에 둬 일부러 메블루트에게 사미하의 이름을 라이하로 알려줬다고 털어놓는다. 라이하가 서른 살에 숨지게 되고, 혼자가 된 메블루트는 마흔을 전후해 20년 전 연애편지의 진짜 주인공이었던 사미하와 재혼한다. 하지만 메블루트가 보자 통을 들고 거리를 나서며 혼자 뇌까리는 말은 독자의 허를 찌른다. “나는 이 세상 무엇보다도 라이하를 사랑했어.”

저자의 대표작 ‘내 이름은 빨강’처럼 신작 역시 주인공 외에도 여러 화자가 자신의 관점에서 사건을 그려나간다. 그 과정에서 라이하가 여동생을 억지로 시집보내려는 아버지에게 “우리는 파는 물건이 아니에요”라고 항의한다거나 자신을 때리지 않는 남편에게 감사함을 느끼는 대목에서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각에 대한 비판의식도 느껴진다.

메블루트의 사랑과 삶 외에도 소설을 읽는 내내 이스탄불의 변천사를 마주하는 재미가 상당하다. 이스탄불 부동산 발전의 연대기, 건축물의 변화상, 전기 소비의 역사, 정치적 재앙과 탄압 등 터키 현대사의 굵직한 역사적 사실들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신작은 지난해 맨부커상 최종 후보작에 올랐다.

김정은 기자 kimje@donga.com
#내 마음의 낯섦#오르한 파묵#이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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