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형의 생각하는 미술관]<43>혼란스러운 세상, 정체불명의 거인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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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의 작품인지를 놓고 논란이 됐던 ‘거인’.
고야의 작품인지를 놓고 논란이 됐던 ‘거인’.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는 사회 혼란기 스페인의 화가였습니다. 무능한 왕실은 부패했고, 종교재판소의 위세는 등등했지요. 미신과 야만도 뿌리가 깊었습니다.

 화가는 왕족과 귀부인의 초상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미술사가 주목하는 걸작들은 따로 있습니다. 나약한 인간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광기와 공포를 묵직하게 표현한 판화와 그림들이지요. ‘거인’도 그중 하나였어요. 그림은 프랑스가 스페인을 점거했을 당시 제작된 것으로 짐작되어 왔지요.

 위급한 상황이라도 발생한 것일까요. 피레네 산맥 아래, 혼비백산한 사람들과 질주하는 마차, 고집스러운 당나귀와 흥분한 소 떼가 뒤섞여 허둥대고 있습니다. 주먹을 불끈 쥔 거인만이 그림 속 아수라장 같은 상황과 무관해 보이는군요. 험상궂은 표정과 위협적인 자세로 서 있는 거인은 누구일까요.

 그림 속 거인에 관한 해석은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거인을 스페인을 위험에서 구해 줄 의로운 수호자라 주장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무자비한 프랑스 점령군에 대항하는 용감한 민중으로 설명하지요. 그런가 하면 누군가는 폭력적 행동을 일삼았던 나폴레옹 군대 혹은 권력을 사납게 휘둘렀던 스페인의 정치 세력으로 여기지요.

 거인을 둘러싼 의견이 분분한 그림에 꾸준히 의혹도 제기되어 왔습니다. 화가의 그림이 아니라는 것이었어요. 이에 소장처인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이 해결에 나섰습니다. 7개월 동안 다각적 연구를 한 끝에 미술관은 빛과 색, 원근법 표현 방식이 화가의 것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게다가 캔버스 왼쪽 하단에서 ‘A. J.’라는 서명까지 발견했지요. 2009년 미술관은 연구 결과를 근거로 그림 제작자가 화가 말년의 조수, 아센시오 훌리아(1759?∼1832)로 추정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림은 인간을 이성적 주체가 아닌 모순적 존재로 파악한 화가만의 인식이 반영된 독창적 산물이 아니었습니다. 위대한 스승의 예술을 답습한 결과물에 불과했지요. 그림의 가치가 크게 축소될 수밖에요. 문제적 개인‘들’의 국정 농단과 이와 관련된 일련의 파문에서 비롯된 자괴감 때문일까요. 요 며칠, 원작자가 거장의 조수로 밝혀진 그림이 머릿속을 점령했습니다. 충격적 현실이 초래한 참담함 때문이겠지요. 오래전 먼 나라 상황만은 아닌 듯한 그림 속 정체불명의 거인과 혼란스러운 세상이 불편하고, 불쾌하게 주변을 맴돌고 있습니다.

공주형 한신대 교수·미술평론가
#프란시스코 고야#거인#아센시오 훌리아#국정 농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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