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자 옆, ‘있지만 없는’ 존재… “저는 누구일까요?”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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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 넘겨주는 ‘페이지 터너’
최대한 관객 눈에 띄지 않도록 검은색 옷만 입고 장신구도 못 해… 소리 없이 한 번에 넘기는 게 요령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의 공연에서 피아노 연주자의 뒤에 있는 페이지 터너(뒤). 금호아시아나재단 제공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의 공연에서 피아노 연주자의 뒤에 있는 페이지 터너(뒤). 금호아시아나재단 제공
지난달 29일 끝난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에서 저는 누구보다 바빴습니다. 기획사 대표지만 피아니스트들이 저를 자꾸 무대에 오르라고 합니다. 악보를 볼 줄 알고, 믿을 수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를 기억하는 관객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는 무대에 있어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음악인들은 저를 ‘넘순이’ ‘넘돌이’라고 부릅니다. ‘넘기는’ 존재라는 뜻이죠. 정식 명칭은 ‘페이지 터너’ 즉, 악보를 넘기는 사람입니다. 피아니스트의 연주회에 자주 등장합니다. 바이올린에 비해 피아노는 음표와 악보 자체가 많아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페이지 터너 중에는 음악 전공자 출신이 많습니다. 외국에서는 이 일만 하는 전문가가 있습니다. 보통 한 차례 공연에서 5만∼10만 원을 받습니다.

연주자는 소리를 내야 하지만 전 소리를 내면 안 됩니다. 악보 넘기는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최선입니다.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한 번에 넘기는 것이 좋습니다. 철저하게 검정 옷만 입습니다. 연주자의 연주에 방해가 될 수 있어 장신구도 못합니다. 얼굴이 잘생기거나 화려하게 생기면 연주자들이 싫어합니다. 연주자나 연주 대신 주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체격이 작거나 인상이 흐릿한 사람을 선호하기도 합니다.

무대에 오르면 지켜야 할 것들도 많습니다. 연주자보다 늦게 입장하고 퇴장합니다. 연주가 끝나고 박수가 나올 땐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거나, 피아노 뒤로 가야 합니다. 연주자의 왼쪽 뒤편에 앉아 있다가 연주가 시작되면 본격적인 일이 시작됩니다. 악보를 넘길 때는 공식이 있습니다. 왼손으로 악보의 오른쪽 위 모서리를 잡고 넘겨야 합니다. 오른손을 사용하면 연주자의 손에 부딪힐 수 있습니다.

현대음악이나 도돌이표가 많은 악보가 어렵습니다. 라벨의 피아노 트리오는 피하고 싶은 악보 중 하나입니다. 시벨리우스의 5중주처럼 142쪽에 달하는 악보의 경우에는 71번이나 일어서야 하기 때문에 체력적인 어려움도 있습니다.

“악보를 넘기다 악보 전체가 피아노 위로 쏟아져 내려 연주가 중단됐다” “악보를 실수로 2장을 넘겨 연주자가 급하게 다시 악보를 넘겼다” “악보를 빨리 넘기려고 하다가 연주자에게 손바닥으로 손을 맞았다” “의자에 앉으려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어 연주자가 놀라 일으켜 세워줬다” 등 실수담도 다양합니다.

잘해야 본전으로 실수하면 연주 자체를 망칠 수 있습니다. 하고자 하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연주자를, 연주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점은 좋습니다. 일부 연주자들과 관객은 말합니다. “악보 넘어가는 소리도 연주회의 일부”라고요.

김동욱 기자 creating@donga.com
#페이지 터너#넘순이#넘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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