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구의 옛글에 비추다]억울한 죽음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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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옛날에 쾌산(快山)의 농부가 밭을 갈다가 피곤하여 쟁기를 놓고 잠시 언덕 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때 호랑이가 나타나 농부를 잡아먹으려 하였다. 이를 본 농부의 소가 호랑이에게 달려들어 힘껏 싸워서 마침내 호랑이를 쫓아 버렸다. 호랑이는 달아났고 밭은 짓밟혀 엉망이 되었다. 농부가 잠에서 깨어 일어났다.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1587∼1671) 선생의 ‘회포를 서술하다(敍懷)’라는 글에 나오는 일화입니다. 호랑이로부터 주인을 구해낸 이 용감한 소에게 농부는 과연 어떤 큰 상을 내렸을까요?

농부는 소가 호랑이를 쫓아내느라 밭을 엉망으로 만든 것은 모르고, 밭을 망쳤다며 불같이 화를 내고는 소를 죽여 버렸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이를 일러 ‘쾌산의 억울한 소(快山원牛)’라고 부른다.

고산 선생은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 당대의 최고 권력자인 이이첨(李爾瞻)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는 것을 시작으로 평생 유배와 은거를 반복했습니다. 이 글은 효종이 세상을 떠난 뒤 예론(禮論) 문제로 서인과 맞서다가 삼수로 유배되었을 때 지었는데 이때 선생의 나이는 74세였습니다. 늙은 신하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올바른 주장을 펴다가 북쪽 변방에 유배되어 죽음을 맞게 되었으니 ‘쾌산의 억울한 소’는 바로 선생 자신입니다.

선생에 대한 정치적 평가는 뒤로 미루더라도, 이어지는 선생의 주장은 분명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일과 똑같지는 않더라도 오늘날 특히나 사회적 약자에게 닥치는 억울한 일, 원통한 죽음 같은 가슴 아픈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하겠기에 하는 말입니다.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이 이렇게까지 뒤집혀져 장차 나라의 사정이 좋아질 것을 기대할 수도 없게 되었으니 너무도 한심하지 않은가. 나라를 사랑하는 자가 진실로 드물구나. 사람이 누구나 제 몸을 사랑하면서도 또한 생각이 여기에 미치는 자가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옛말 그대로, 큰 집 한쪽에 불이 붙어 불길이 치솟고 있는데 제비는 집 속에서 새끼와 조잘대며 그 불길이 저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것도 모른다는 격이라. 그저 슬플 뿐이다(大廈一隅, 火焰已熾, 而處堂之燕, LL然不知禍之將及己者也. 其亦可哀也已).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회포를 서술하다#고산 윤선도#성균관 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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