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의 따뜻한 동행]어머니의 선물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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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출발한 기차가 수원역을 지날 때쯤, 한 할머니가 딸과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얘야, 내가 봉투 하나 냉동실에 넣어 놨다. 그 돈으로 너 변변한 외출복 한 벌 사 입으라고.”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리치는 딸의 음성이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이 참 엄마는! 엄마 쓰라니까 왜 놓고 가셨어요. 엄마 정말 왜 그래.”

이어지는 통화를 더 듣지 않아도 전후 사정이 충분히 그려졌다. 서울에 사는 딸은 고향집으로 가시는 엄마에게 용돈을 챙겨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팍팍한 서울살림을 눈치챈 엄마는 도리어 돈을 더 보태어 딸에게 주고 싶었을 것이고, 한사코 받지 않으려는 딸에게 조용히 돈을 전달할 궁리를 짜낸 것이리라. 그러고는 딸이 뒤쫓아 오기라도 하는 듯이 기차가 수원을 지나서야 안심하고 전화를 건 것.

그 대화에서 20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시어머님께서 아들에게 봉투 하나를 내놓으시며 말씀하셨다. “요번에 대학원에 들어갔다니 꼭 양복 한 벌 사 입어라. 너 학교 다닐 때 제대로 된 옷 한 벌 사 입히지 못한 게 평생 마음에 걸렸는데 이렇게 해줄 수 있어서 참 좋다.” 남편은 완강하게 손사래를 쳤지만 나는 받을 것을 종용했다. 막내아들이 상경하여 어렵사리 대학에 다닐 때 옷은커녕 등록금도 대주지 못했던 일이 한이 맺혀 그러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읽어서였다. 이번에는 아들이 직장을 다니며 늦깎이 대학원생이 된 것이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학교에 입학한 아들’에게 옷을 사주고 싶으신 거였다. 허리가 잔뜩 굽은 노모가 내주시는 두툼한 봉투는 형용할 수 없는 아픔과 감동으로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시어머님은 10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그 양복은 지금도 우리 옷장에 걸려 있다. 그 옷을 볼 때마다 가난한 시절을 건너온 우리 어머니들의 애틋한 자식사랑이 생각나서 가슴이 뻐근해진다. 옷이 날개라는데, 아마도 어머니는 아들에게 세상을 훨훨 날아오를 수 있는 날개라도 달아주고 싶으신 것이 아니었을까.

며칠 있으면 설 명절이다. 우리 부부는 어머니가 안 계신 시댁과 친정에 다녀오지만 아직 어머니가 살아계신 고향에 가는 아들딸들은 얼마나 좋을까 부럽다. 기차에서 통화를 나눈 그 할머니의 딸이 더 이상 사양하지 말고 이번 설에는 부디 좋은 옷을 사 입고 친정에 갔으면 좋겠다. 그게 어떤 선물보다 엄마를 기쁘게 해드릴 테니까 말이다.

윤세영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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