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면 그림 속에 숨은 섬세한 종이 입체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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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준 ‘블랙아웃 스케이프’전

노상준의 2012년작 ‘에메랄드 호수’(위 사진)와 ‘Holiday Land’. 골판지로 만든 모형에 색을 입혀 호수, 사막, 바위, 조각배, 자동차를 표현했다. 가나아트센터 제공
노상준의 2012년작 ‘에메랄드 호수’(위 사진)와 ‘Holiday Land’. 골판지로 만든 모형에 색을 입혀 호수, 사막, 바위, 조각배, 자동차를 표현했다. 가나아트센터 제공
초등학교 때 종이를 가위로 오려내 투명 테이프나 풀로 붙여 비행기나 자동차 모형을 만든 적이 있었다. 8월 9일까지 서울 종로구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노상준 작가(39)의 개인전 ‘Blackout Scape’는 어린 시절 여름방학 숙제로 만들었던 종이 모형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물론 그 만듦새는 방학숙제와 감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섬세하다.

사진으로만 언뜻 보면 30여 점의 전시 작품은 그저 해변, 호수, 사막을 위에서 내려다본 원경(遠景)의 회화로 보인다. 실체는 입체의 종이 조각이다. 재료는 흔해 빠진 골판지. 노 씨는 “영국 유학 시절 한국에서 날아온 소포 상자를 받아들 때마다 그게 유일한 모국과의 소통 매개임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리고 박스 종이를 자르고 찢고 채색해 자잘한 입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복장과 자세를 정교하게 표현한 손톱만 한 종이 인형, 라이트와 바퀴 디테일을 살린 형형색색의 종이 미니카, 표면의 스크래치까지 놓치지 않고 재현한 원양 여객선, 종이 모형 만들기를 해본 모든 아이들이 한 번쯤 꿈꾸었던 궁극의 오브제 항공기까지. 작가의 경험과 기억에서 소환된 물체들이 골판지 모형으로 재현돼 새롭게 배치된 상황 속에 미니어처 디오라마(특정 장면을 연출한 모형)처럼 편집됐다.

바람이 일면 금방이라도 움직일 듯한 쪽빛 바다와 푸른 호수의 풍경이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하늘에서 본 세계’를 연상시킨다. 넘실대는 구름바다 위에 오밀조밀 둥둥 떠 있는 비행기들처럼 물론 이 모든 ‘평면 닮은 입체’는 현실 닮은 비현실이다. 재료의 온도감과 상쾌한 색채 덕분에 낯설고 불안하기보다는 흥미로우면서도 편안하다.

최근 노 씨는 골판지 조각 작업보다 캔버스를 찢어 잘라 붙이며 채색한 입체 설치와 추상 아크릴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전시실 2층에 걸린 최근작은 골판지 조각의 오밀조밀한 재미와 다른 질감을 전한다. 일렁여 모인 파도가 푸른 꽃잎으로 흩어진다. 여름방학 공작숙제가 헛된 노동만은 아니었나 싶다. 02-720-1020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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