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비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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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서울284 ‘은밀하게 황홀하게’전

이상진 작가의 ‘라이팅 토크’(2015년). 고풍스러운 옛 귀빈실 장식을 감추지 않고 작품 배경에 그대로 살렸다. 공연히 애써 가렸던 흔적이 품은 시간의 가치가 ‘빛’에 의해 드러났다. 문화역서울284 제공
이상진 작가의 ‘라이팅 토크’(2015년). 고풍스러운 옛 귀빈실 장식을 감추지 않고 작품 배경에 그대로 살렸다. 공연히 애써 가렸던 흔적이 품은 시간의 가치가 ‘빛’에 의해 드러났다. 문화역서울284 제공
서울 중구 문화역서울284(옛 서울역사)는 재활용에 예상외의 난항을 겪고 있는 공간이다. 여러 세대 전에 지어진 기념비적 건물의 외피를 남겨 다른 용도로 쓴 좋은 선례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20여 년 동안 방치된 화력발전소를 탈바꿈시킨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이 빈번히 언급된다. 역사적 사연, 규모나 공간 구성을 따져볼 때 문화역서울284의 모델은 테이트모던보다 홍콩 아시아 소사이어티 갤러리 쪽에 가까울 것이다.

영국군이 쓰던 탄약 창고를 개조한 아시아 소사이어티 갤러리는 식민지 점령군이 철수하면서 옛 기지에 남겨놨을 법한 그늘의 조각을 찾아볼 수 없는, 세련된 전시 공간이다. 외부 형태는 고풍스럽기 그지없지만 내부는 밝고 쾌적하다. 식민지 역사의 자취를 감추거나 지우지도 않았다. 비영리재단에 이 공간을 임대하며 정부가 제시한 조건 중 하나는 ‘원형 보존’이었다. 진입로에서는 드문드문 구형 대포 포신도 볼 수 있다.

위 사진부터 조덕현의 설치작품 ‘모성’, 사진작가 장태원의 ‘진부한 풍경 003’, 검은색 점토를 낚싯줄에 접착시켜 다양한 형상을 표현한 함진의 설치물 ‘도시이야기’. 문화역서울284 제공
위 사진부터 조덕현의 설치작품 ‘모성’, 사진작가 장태원의 ‘진부한 풍경 003’, 검은색 점토를 낚싯줄에 접착시켜 다양한 형상을 표현한 함진의 설치물 ‘도시이야기’. 문화역서울284 제공
문화역서울284는 일제가 1925년 식민지 조선의 수도 한복판에 세운 건물이다. 악몽 같은 시절에 지어졌지만 ‘건물이기 전에 길의 일부여야 하는’ 기차역 건축의 가치를 충실히 담은 공간이었다. 그러나 유리벽으로 감싼 새 역사 건물에 가려 뒷전으로 물러난 뒤에는 오래 묵은 옛 공간의 정취도, 복합문화공간이라는 새롭게 부여된 기능의 정체성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애처로운 흉물이 됐다.

7월 4일까지 이곳에서 열리는 ‘은밀하게 황홀하게: 빛에 대한 31가지 체험’전은 우울하게 주저앉은 이 역사적 공간의 재생을 조심스럽게나마 다시 기대하도록 만든다. ‘빛’이라는 키워드를 내세우고 8개국 31개 작가팀의 사진, 설치, 미디어아트 작품을 모아 늘어놓은 프로그램 자체가 획기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서울 중심가 어느 곳에서도 제자리를 잡지 못한 갖가지 소음이 배수구를 찾듯 이곳에 모여드는 까닭을 찾은 것이 중요하다. 결국 부족한 건 빛이었다.

공간 구성을 새롭게 바꾼 건 없다. 원래 있던 것을 애써 가려 감추지 않고 오히려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 달라진 점이다. 2층 식당 벽면을 비추는 프랑스 작가 스테노프에스의 ‘파리-프랑수아’가 그 변화를 뚜렷이 보여준다. 영상은 반드시 청결한 스크린을 필요로 할까? 그렇지 않다. 시공을 뛰어넘은 파리의 옛 건물 이미지 영상이 식민지 조선에서 물려받은 공간의 뼈대를 비춘다. 애써 감추려 했던 ‘아름다움’이 비로소 드러난다.

작가의 일은 작업실에서 도구를 놓는 순간 종료되는 것이 아니다. 작품 하나만 놓고 보면 그저 발광다이오드(LED) 육면체일 뿐인 이상진의 ‘라이팅 토크’는 관객과 만날 공간과 작품을 어떻게 교배시킬 것인가 고민하는 시간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2층 계단을 사람 그림자와 빛으로 채워낸 ‘그린 룸(RGB)’, 빛 사이 암전에 의해 드러나는 잔상의 의미를 살핀 ‘세트(미국식 목조주택)’를 내놓은 작가그룹 뮌도 눈여겨볼 대상이다. 문제는 공간이 아니다. 어떻게 쓰느냐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문화역서울284#테이트모던#빛#스테노프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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