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정복자들은 神처럼 와 우리를 없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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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당한 자의 시선/미겔 레온-포르티야 엮음/
고혜선 옮김/349쪽·1만8000원/문학과지성사
스페인의 아스테카 왕국 정복… 멕시코 민족 관점에서 서술
“왜 이런 일 일어났나”…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도 보여

멕시코 중앙고원에 자리한 ‘달의 피라미드’. 아스테카 제국에서 세상의 종말을 막고자 인간의 심장을 바쳤던 곳이다. 동아일보DB
멕시코 중앙고원에 자리한 ‘달의 피라미드’. 아스테카 제국에서 세상의 종말을 막고자 인간의 심장을 바쳤던 곳이다. 동아일보DB
‘물감을 푼 듯 빨개진 호수/그 물을 마시면/초석 섞인 물을 마신 듯하고. (…) 방패로 보호를 하던 담,/이제는 방패마저 그 외로움을 보호할 수 없다.’ ‘여보게들, 우시게나./이제 우리 멕시카 민족이/사라졌다는 것을 받아들이시게나.’

나우아틀어로 쓰인 이 두 편의 시에서 시인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 스러져 가는 것을 목도하며 탄식한다. 나우아틀어는 현재 멕시코 지역에 거주하던, 아스테카 제국의 사람들이 쓰던 말이다. 시가 쓰인 시기로 추정되는 때는 1520년대. 스페인이 아스테카 제국을 멸망시킨 직후다.

스페인의 아스테카 정복 전쟁의 기록은 주로 정복자 스페인의 관점에서 쓰였다. 이 책은 그러나 정복당한 자의 시선에서 이 전쟁을 적는다. 책의 편자가 전쟁에서 살아남은 시인들과 작가들이 남긴 시와 기록, 원주민 학생들이 노인들의 구술을 토대로 기록한 자료, 문서에 담긴 그림들을 토대로 피정복자가 쓴 전쟁사를 엮은 것이다.

멕시코와의 전쟁 전 나타난 불길한 징조를 그린 원주민들의 그림. 문학과지성사 제공
멕시코와의 전쟁 전 나타난 불길한 징조를 그린 원주민들의 그림. 문학과지성사 제공
멕시코 고원의 호수에 자리 잡은 아스테카 제국은 웅장하고 화려한 문화를 꽃피운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들을 침략한 스페인 군대 앞에서 이 제국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정복자 코르테스를 마주한 아스테카 제국의 모테쿠소마 왕의 기록을 보면, 몰락의 첫 기미를 엿볼 수 있다. 날카로운 불길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신전이 낙뢰로 손상되는 등 불길한 징조가 이어졌던 터였다. 두려움에 떨던 왕은 자신들의 땅에 들이닥친 스페인 장군을 신으로 오해했다. 군대가 데리고 온 말을 처음 보고는 ‘뿔 없는 사슴’이라고 생각했다. 신에게 바치겠다며 온갖 보석과 장신구를 마련했다. 선물을 내놓은 아스테카의 사신들 앞에서 스페인 군대가 한 일은 대포를 발사한 것이었다. 잇단 어두운 예후들로 인해 적과 맞서기도 전에 겁을 먹은 데다, 막상 마주했을 때 왕은 적에 대해 무지했다.

전략을 들여다보면 이 전쟁이 왜 제국의 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지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가져온 것을 앞에 보였다. 그가 다 볼 수 있도록 광주리에 펼쳐 놓았다. 대장과 말린체가 이것을 보고 노발대발하며 말했다.”(239쪽) 스페인 사람들이 금을 찾는 장면에서 스페인 장군 코르테스의 통역자 말린체가 등장한다. 다른 기록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말린체는 스페인인이 아니라 아스테카 제국 인근에 살고 있던 여성이다. 그만큼 제국의 사정을 소상하게 알고 있고 그 정보를 스페인 군대에 넘겨주는 역할을 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여기에다 스페인 군대 편에 선 아스테카 제국 주변 종족들의 모습도 묘사된다. 남미 최강국이었다는 아스테카 제국이 왜 전쟁이 시작된 지 2년도 되지 않아 몰락했는지 짐작되는 대목이다.

이 기록들이 의미 있는 것은 피정복자의 시각으로 쓰였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삶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려는 패자의 노력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번역자 고혜선 씨는 “자신의 독창적인 문화의 가치, 역사의 가치를 인식한 한 민족이 남겨둔 귀중한 증언을 오늘의 독자에게 제시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피정복의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도 예사롭게 읽히지 않는 부분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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