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례 치른 제주 며느리, 시가에서 토지-가축 상속 받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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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조선시대 제주 풍속자료 공개


《 동네 안쪽 논, 감남지 들녘에 있는 보리밭, 연화지 들판에 있는 보리밭 (중략) 수말 두 마리, 암소 한 마리를 모두 며느리에게 따로 남긴다.’ (1691년 1월 3일)조선 후기 제주도 유지였던 진주 강씨의 분재기(分財記·재산의 상속과 분배를 기록한 문서)다. 시아버지 강세융이 갓 시집온 28세 큰며느리 고 씨에게 토지와 가축을 따로 물려준다는 내용이다. 이 유산은 남편도 함부로 손댈 수 없었고 나중에 자신의 며느리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

바람이 센 제주도에선 묘지를 돌담으로 보호하는데 이 힘든 작업을 해낸 노비를 양인으로 풀어주기도 했다.
바람이 센 제주도에선 묘지를 돌담으로 보호하는데 이 힘든 작업을 해낸 노비를 양인으로 풀어주기도 했다.
이 기록처럼 조선시대 제주도에서는 혼례를 막 치른 며느리가 시댁을 처음 방문하는 날 재산을 상속받는 관습이 있었다. 당시 혼례한 아들에게 재산을 나눠주는 사례는 육지에서 종종 발견되지만, 며느리에게 특별상속을 한 것은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습이었다.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국학자료연구실장은 “제주 해녀에서도 볼 수 있듯 제주도는 예부터 경제권의 상당 부분이 여성에게 있었던 점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했다.

한중연 장서각은 최근 약 1750점에 이르는 16∼19세기 제주도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토지와 노비 상속문서는 물론이고 묘지 소송, 호적, 과거시험 답안지 등 생활사 자료들이 망라돼 있다.

조선시대 제주도에는 뭍에 없는 풍습이 적지 않았다. 갓 시집온 며느리에게 재산을 나눠주는 풍습을 보여주는 문건.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조선시대 제주도에는 뭍에 없는 풍습이 적지 않았다. 갓 시집온 며느리에게 재산을 나눠주는 풍습을 보여주는 문건.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이 중 제주 ‘테우리(말을 키우는 목동)’들의 고단한 삶을 담은 기록이 눈에 띈다. 조선시대 제주도에는 약 60개 목장에서 300∼400명의 테우리들이 국가 소유의 말들을 길렀다.

‘상전께 드리는 명문. 저의 처남인 노선봉은 테우리로 동색마(同色馬)를 납부할 길이 없어 관으로부터 친족이 대신 납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이에 상전께서 두 살짜리 수말 1필을 빌려주셨으므로 말 값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밭 10두부지(斗付只)로 치르겠습니다.’ (1732년 12월 5일)

집안 하인이 상전에게 말 한 필을 빌리는 대신 자신의 토지를 넘기겠다는 내용이다. 테우리였던 그의 처남이 키우던 말 한 마리를 잃자 관청에 대신 말을 갚기 위한 것. 테우리는 키우던 말이 죽거나 사라지면 이를 같은 색깔의 말로 국가에 갚아야 했다. 만약 본인이 갚지 못하면 친척들이 대신 갚도록 했다.

자유를 얻은 노비의 얘기도 전한다. ‘하인 차석에게 주는 방량문(放良文). 차석은 네 아들들을 거느리고 한 면에 수백 보쯤 되는 내 부친 산소의 담장을 온전히 쌓았으니 대저 그것은 충(忠)이요 성(誠)이며 공(功)이다. (중략) 어찌 포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차석을 특별히 방량하니 이후 증거로 삼을 일이다.’ (1837년 12월 7일)

강재명이 집안 노비인 차석에게 양인 신분으로 풀어줄 것을 약속하며 직접 수결(手決·일종의 서명)한 문서다. 이에 따르면 차석은 강재명 부친의 묘소 주위로 소나무를 심고 커다란 돌담을 쌓는 작업을 완수했다. 제주도에서는 거센 바람 등으로부터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이른바 ‘산담’을 쌓았는데 이것은 노비를 풀어줄 정도로 상당한 고역이었다. 무거운 현무암을 찾아 다듬은 뒤 여러 사람이 옮겨 하나씩 쌓아야 했기 때문이다.

김학수 한중연 국학자료연구실장은 “제주도에서는 장례 전후 마을사람들이 모여 산담을 쌓는 이른바 ‘산담계’를 만들어 서로 돕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제주#며느리#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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