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화가’가 그려낸 원시의 제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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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변시지 화백 1주기 특별전… 9월말까지 제주서 개최

변시지 화백의 유화 ‘폭풍’(1990년). 그의 ‘제주시대’ 중에서도 거친 필치와 무거운 황토색을 기반으로 한 전기에 속하는 작품이다. 기우뚱한 초가 돌담집과 구부러진 소나무에서 거친 바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2000년 이후에는 환한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평온한 작품을 그렸다. 아트시지 제공
변시지 화백의 유화 ‘폭풍’(1990년). 그의 ‘제주시대’ 중에서도 거친 필치와 무거운 황토색을 기반으로 한 전기에 속하는 작품이다. 기우뚱한 초가 돌담집과 구부러진 소나무에서 거친 바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2000년 이후에는 환한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평온한 작품을 그렸다. 아트시지 제공

그의 그림은 잘 팔렸다.

일본 최고 권위의 미전에서 역대 최연소로 최고상을 거머쥔 조선 청년의 인물화를 일본인들은 좋아했다. 귀국 후 서울의 고궁을 그린 섬세한 풍경화도 그리기 무섭게 화상들이 큰 시장 일본으로 팔아주었다. 하지만 중년이 된 그는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혼자 제주로 향했다. 서울∼제주 간 비행편이 주 1회이던 시절이다. 스스로 선택한 유배생활은 쓸쓸했고 황토색 그림은 팔리지 않았지만 그는 결국 제주의 화가로 남았다.

가장 제주다운 그림으로 세계적인 서양화가가 된 우성 변시지 화백(1926∼2013·사진)의 1주기를 맞아 26일∼9월 30일 제주시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에서 특별전이 열린다. 전시의 주제인 ‘빛과 바람, In full spectrum’에 나와 있는 대로 화려했던 일본 생활을 거쳐 제주에 정착하기까지 화풍의 변화를 100여 점의 작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

그의 미학적 전환점은 거주지의 이전과 맞물려 있다. 인물화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일본시대(1947∼1957년), 고궁의 풍경을 극사실주의로 그려낸 서울시대(1957∼1975년), 황토색 바탕에 먹빛 선묘로 제주의 원시성을 그려낸 제주시대(1975∼2013년)로 나뉜다.

서귀포시에서 태어난 고인은 6세 때 부모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1948년 22세의 나이로 일본 광풍회(光風會)전에서 최연소 최고상을 받았다.

화려했던 20대 일본시대를 보여주는 작품들은 따스한 톤으로 그려낸 인물 좌상들이 많다. 좌상은 당시 일본 화단의 인기 소재였다. 서울시대로 접어들면 온통 고궁 풍경화다. 그는 현대적 면모를 갖춰 가는 서울보다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남아 있는 고궁에 주목했다. 그려 넣은 기왓장 수가 실제 기왓장 수와 같을 정도로 섬세하고 치밀한 화풍이 특징이다.

변시지 화백의 ‘일본시대’에 속하는 인물화 ‘휴식’(1948년)과 ‘서울시대’의 풍경화 ‘겨울 향원정’(1965년). 아트시지 제공
변시지 화백의 ‘일본시대’에 속하는 인물화 ‘휴식’(1948년)과 ‘서울시대’의 풍경화 ‘겨울 향원정’(1965년). 아트시지 제공
제주시대의 그림은 극도로 단순해진다. 그에게 제주는 빛과 바람의 섬이었다. 고인은 생전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공항에 처음 내렸을 때 태양빛이 강렬하게 비추면서 모든 것이 누렇게 다가왔다. 제주는 누런색이었다”고 했다. 제주는 씨를 뿌리면 흙까지 날아가버리는 바람의 섬이다. 그의 그림에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동력은 바람이다. 거칠게 몰아치는 파도, 쓰러져가는 초가와 돌담, 불귀(不歸)의 짝을 기다리는 남정네 혹은 아낙의 옷자락, 조랑말의 성치 않은 갈기와 까마귀 떼의 날갯짓에서도 바람을 느낄 수 있다. 그를 ‘폭풍의 화가’라 부르는 이유다.

제주적인 색과 소재에서 전해지는 정조는 섬의 고독과 기다림이다. 그림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등 굽은 사내, 혹은 지팡이를 쥔 사내가 이 불모의 쓸쓸한 풍경이 관조의 대상이 아닌, 누군가에겐 생활의 터전임을 일깨운다.

김유정 미술평론가는 “풍토가 예술의 전부라던 고인은 제주의 진짜 얼굴을 찾아내 시원적 삶의 섬, 척박한 풍토, 역사와 수난의 섬 제주를 절제된 색으로 표현해냈다”며 “한반도 본토의 미학과는 다른 ‘제주이즘’이라는 양식화를 구현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가 그려낸 제주는 국제 관광도시 제주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서 제주만의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은 2007년 6월부터 10년간 우성의 회화 작품 2점을 대여해 전시 중이다. 인터넷 포털 야후는 1997년 ‘르네상스 이후 세계 100대 화가’에 그를 선정했다.

제주=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변시지#제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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