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결론이란 없다” 98세에 개인전 여는 화가 김병기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3일 16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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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별에서 왔을까.

그의 시간은 느리게 흐르나보다. 김환기(1913~1974) 유영국(1916~2002) 이중섭(1916~1956)과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함께 쓰고, 정상화(82) 최만린(79) 윤명로(78) 같은 원로 화가들을 길러낸 재미화가 김병기(98)가 개인전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시차' 때문에 잠시 어지러웠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내년 3월1일까지 과천관에서 개최하는 한국현대미술작가시리즈 올해의 마지막 전시 '김병기: 감각의 분할'전이다.

그는 최고령 현역 작가다. 60년 넘게 일궈온 화업을 압축하는 회화 70여점과 드로잉 30여점이 걸려있는 전시장엔 미국 LA 할리우드 마운틴의 풍광이 내다보이는 작업실에서 그려낸 신작들도 있다. 테이프를 붙였다 떼어내 생긴 가느다란 선과 굵은 붓질이 거칠게 지나간 사이로 앙상한 인체가 숨어있고('방랑자', 2012년), 캔버스를 채운 붉은 물감에선 몬드리안과 단청의 색감이 공존한다('연대기', 2013년). 구상과 추상, 전통과 현대의 이분법을 넘어보려 그는 여전히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1+1은 2일까요? 예술에서 이런 절충주의는 타격의 대상입니다. 1+1이 3이나 4, 혹은 0이나 9가 돼야 창조적인 제3의 것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어요. 새로운 감각과 새로운 사고가 있을 뿐이지요."

1916년 평양의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난 불발탄 같았다"고 했다. 화가이자 문인, 고미술 수집가이자 한국 최초의 미국 영화 배급업자였던 아버지의 부재가 오래도록 이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능을 물려준 건 아버지 김찬영이었다. 한국에서 세 번째로 도쿄에서 서양화를 배운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김환기 이중섭과 추상을 배우고 돌아와 한국 추상미술 정립을 주도했다. 화가이자 비평가, 교육 및 행정가로 한국 현대미술의 토대를 닦던 그는 49세에 미국으로 떠나 그림에 집중했다.

"한국을 떠난 지 49년이 지났네요. 한국에선 서양만 생각했는데, 서양에선 동양만 바라봤어요. 이런 멋진 나라를 두고 어디에 살았나 싶습니다."

그의 신작들도 동양으로 기울어가는 듯하다. 색이 빠지고, 안료의 두께도 얇다. 칠하기보단 긋는다. 그만큼 투명하고 여백이 많다. 김 화백은 "요즘은 자꾸 지우게 된다"고 했다. "(스위스의 조각가인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막대기 같은 조각상처럼 나도 맘에 안 들어 떼어내게 돼요. 다 떼어내고 나면 공간이 생깁니다. 무와 비움의 세계. 물리적인 공간을 초월한 세계이죠."
김 화백은 "이젠 여생(餘生)이랄 것도 없다"고 했는데, 영상으로 만나 본 작업실 속 그의 붓질은 힘찼다. 후학들에겐 "선배를 따라해선 제대로 계승을 못한다. 부수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예술엔 결론이란 없습니다. 과정이 있을 뿐이지요."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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