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인터넷 감시에 맞선 암호무정부주의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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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퍼펑크/줄리언 어산지, 제이컵 아펠바움, 앤디 뮐러마군, 제레미 지메르망 지음·박세연 옮김/240쪽·1만4000원·열린책들

진부하지만 발칙한 상상을 해보자. 전 지구가 앞선 문명을 지닌 외계인에게 정복당하고 이에 자유를 꿈꾸는 인간의 반란이 준비된다. 멀리 떨어진 동료에게 ‘혁명’ ‘폭탄’ ‘테러’ 등의 불순한 단어를 포함한 휴대전화나 e메일을 보내면 어떨까. 시스템을 장악한 외계인에게 들켜 조직이 일망타진되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종이편지로 대신할 순 없다. 변화된 기술 환경에 걸맞은 새로운 전략과 전술이 필요하다. 현대 정보 사회에서 자유로운 개인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암호(cypher)’ 기술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책 제목을 ‘사이버(cyber)펑크’로 잘못 읽기 쉽다. 조금은 생소한 ‘사이퍼펑크’가 진짜 제목이지만 그렇다고 크게 실수한 것도 아니다. 둘은 연결된 개념이다. 강대국 정보기관의 눈엣가시 위키리크스를 만든 줄리언 어산지가 사이버-사이퍼 펑크의 흐름을 갈라 잡는다.

사이버펑크는 정보 사회의 등장과 맞물린 대안 운동의 원조다. 국가나 자본이 쌓은 ‘정보의 성(城)’으로 돌진해 순식간에 이를 헤집어 놓는 해커를 떠올리면 쉽다. 사이퍼펑크는 이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2.0 방식의 행동 철학이다. 인터넷은 이미 개인의 노동과 사상, 심지어 사생활까지 꼼꼼히 감시하는 리바이어던(거대괴물)이 됐다. 여기서 포기하면 인간은 구글, 페이스북 등 거대 인터넷 기업의 주가를 떠받치는 광고 소비자, 국가에 세금만 받치는 ‘봉’이 될 뿐이다.

이에 권력이 제시하는 암호 표준에 맞서 사회·정치적 변화의 주도권을 쥐자는 운동이 바로 사이퍼펑크다. 위키리크스가 이 운동의 정치적 표출이라면, 최근 파일공유(P2P) 방식의 전자화폐로 널리 알려진 비트코인은 경제적 사이퍼펑크다. 초감시 사회 안의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한 저항 근거지다.

이 책은 어산지 외에도 인터넷 검열을 피하기 위한 온라인 익명시스템인 ‘토르 프로젝트’의 개발자 제이컵 아펠바움, 유럽 디지털권리(EDRI) 공동 설립자 앤디 뮐러마군 등도 등장한다. 암호무정부주의(crypto-anarchist) 운동의 최전선에 서 있는 대담집이라 쉽진 않지만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사이퍼펑크#암호#인터넷 검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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