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非전투원 조선인들, 러시아에 포로로 끌려가 갖은 고초”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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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110주년 국제학술대회… 조재곤 교수 ‘한국인 포로 사연’ 소개

러일전쟁은 제국주의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국제전이었지만 그 전장이 한반도가 되는 바람에 애꿎은 조선인들이 포로로 붙잡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사진은 러일전쟁 당시 울산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 동아일보DB
러일전쟁은 제국주의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국제전이었지만 그 전장이 한반도가 되는 바람에 애꿎은 조선인들이 포로로 붙잡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사진은 러일전쟁 당시 울산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 동아일보DB
러일전쟁(1904∼1905) 기간 전쟁 당사국민도 전투원도 아니었는데 러시아에 포로로 끌려가 고초를 겪은 조선인이 상당수 있었음이 확인됐다.

러일전쟁 발발 110주년을 맞아 22일 동북아역사재단 대회의실에서 열리는 국제학술대회 ‘러일전쟁 100년을 말하다’에서 소개될 조재곤 덕성여대 교수의 발표문 ‘러일전쟁과 한국인 포로 처리’에는 이들 한국인 포로의 기구한 사연을 상세히 소개돼 있다.

러시아군은 전쟁 기간 생포한 조선인 포로를 일본군 포로와 함께 조선에서 1만 km 떨어진 핀란드 만 인근 메드베지 포로수용소로 끌고 갔다. 이들은 주로 일본 상선이나 어선에 타고 있다가 전쟁을 전후해 나포된 이들로 최소 20여 명에 이르렀다. 일본 상선 히기우라마루호 사무원이었던 한득청을 비롯한 조선인 선원(10∼15명 추정), 포경선 선원 김하룡과 대한제국의 현직 관리였던 함경도 길주군수 이익호, 종성군수 주철준 같은 인물도 포함됐다.

1905년 9월 전쟁이 끝나자 일본군 포로들은 같은 해 12월부터 이듬해 3월에 걸쳐 모두 일본으로 송환됐지만, 이익호와 주철준을 제외한 조선인 포로 대다수는 그럴 수 없었다. 귀국비용도 개인적으로 마련해야 했고, 일본군이 아니라 러일 정부도 별 관심이 없었다. 이 때문에 히기우라마루 선원들은 1906년 6월에야, 김하룡도 러시아-영국-일본을 거치는 지난한 여정 끝에야 1907년 2월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조선인 1명은 끝내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이역만리 러시아 땅에서 죽고 말았다. 조 교수는 “러일 양국 모두 헤이그조약에 따라 상대국 포로를 예우했지만, 무력한 대한제국 치하에서 자신들의 송환 의지를 반영시킬 방법이 없던 조선인 포로는 보호와 배려를 받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러시아사학회 주최로 열리는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원의 ‘러일전쟁 발발 직전의 러일협상’ △올레크 아이라페토프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대 교수의 ‘러일전쟁기 러시아의 군사정책’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의 ‘일본에서 바라본 러일전쟁의 시각’ 등도 발표된다. 02-2012-6112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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