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속량 과정에 노비해방 브로커 활약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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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경목 교수 논문 발표

1703년 노비 해방 대행업자로 추정되는 김정삼이 노비 윤월의 남편 또는 아들로 추정되는 김선백에게 써준 확인 문서. 윤월이 스스로 돈을 마련해 양인이 되는 과정에서 김정삼이 새 주인인 것처럼 이름을 빌려줬고, 당시 증명서는 또다른 노비 최선위에게 줬기 때문에 훗날 자손들 사이에 분쟁이 생기면 증거로 제시하라고 쓰여 있다. 전경목 교수 제공
1703년 노비 해방 대행업자로 추정되는 김정삼이 노비 윤월의 남편 또는 아들로 추정되는 김선백에게 써준 확인 문서. 윤월이 스스로 돈을 마련해 양인이 되는 과정에서 김정삼이 새 주인인 것처럼 이름을 빌려줬고, 당시 증명서는 또다른 노비 최선위에게 줬기 때문에 훗날 자손들 사이에 분쟁이 생기면 증거로 제시하라고 쓰여 있다. 전경목 교수 제공
‘지난 신사(辛巳)년에 이 고을에 살던 죽은 계집종 윤월이가 스스로 돈을 마련하여 속량(贖良)할 때 내가 이름을 빌려주길 허락하여 가명으로 (윤월을) 사들였다. 사문(斜文·관아에서 발급받은 증명서)을 아울러 돌려줬어야 하는데, 사문에 함께 써 있던 최선위에게 주었으므로 훗날 자손 중에 잡담이 있거든 이 문서를 가지고 관아에 가서 바로잡아라.’

1703년 김정삼이라는 사람이 윤월의 남편 또는 아들로 추정되는 김선백에게 써준 문서의 일부다. 2년 전인 1701년 김정삼은 윤월의 속량 과정에서 자신이 윤월을 사는 것처럼 이름을 빌려주고 문서를 작성했다. 돈은 윤월이 마련했고 나중에 김정삼은 윤월이를 양인(良人)으로 풀어주었다. 김정삼은 노비의 해방을 알선해주는 일종의 브로커였던 셈이다.

조선 후기 노비가 주인이나 국가에 돈이나 곡식을 내고 양인이 되는 속량이 빈번해지면서 이 과정에서 노비 해방을 알선해주는 대행업자가 있었을 것이라는 새로운 주장이 나왔다. 당시 속량은 법전 ‘속대전’에 관련 규정이 명시돼 있을 정도로 제도화된 신분 해방의 방법이었고 그 절차도 수월해지고 있었다.

전경목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사진)는 이런 주장을 담은 논문 ‘조선 후기 노비의 속량과 생존전략’을 최근 한국고문서학회 연구발표회에서 발표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조선 후기에 김정삼처럼 이름을 빌려주고 노비 매매문서를 작성한 뒤 관아에서 증명서를 받아주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전 교수는 “김정삼의 문서에는 그가 윤월뿐 아니라 최선위라는 노비의 속량까지 대행해준 것으로 나타나 그가 직업적 대행업자임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미 속량이 제도화된 상황에서 대행업자가 나타난 이유가 뭘까. 조선 후기에 대부분의 양반은 여전히 천인을 양인으로 풀어주는 것이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고 조상에게도 죄를 짓는다고 여겨 속량을 꺼렸다. 게다가 양반이 노비를 속량해줄 때 일반 매매가보다 서너 배 높은 가격을 요구하는 사례가 많았다는 게 전 교수의 설명이다.

이에 따라 노비로서는 나름의 생존전략이 필요했다. 전 교수는 “노비들이 ‘바가지’ 가격을 피하기 위해 전 주인 몰래 가짜 주인을 내세워 일반 매매가로 거래한 뒤 대행업자로부터 확인서를 받아 평민으로 풀려났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관행이 알려지자 체면상 속량을 꺼리던 양반들도 돈을 목적으로 암암리에 대행업자를 이용했다. 주인과 노비가 브로커를 끼고 ‘짜고 치는 고스톱’을 친 셈이다.

또 전 교수는 “노비 입장에선 속량할 때 주인의 얼굴을 마주 보며 매매문서를 작성하기 껄끄러웠을 테고, 속량 절차를 밟기 위해 사나운 아전이 있는 관아에 나가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었을 것”이라며 “이런 여러 필요에 따라 ‘가짜 주인’이 등장했고, 그 가짜 주인이 속량 대행업자일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했다.

1733년 김아무개가 사내종 준석에게 써준 문서도 흥미롭다. ‘산소의 석물(石物)을 마련해야 하나 (돈을 마련할) 다른 방법이 없어 고민하던 중이었다. 지금 들으니 네가 속량하길 자원한다고 하더구나. 은자(銀子) 50냥을 받고 영원히 속신(贖身)함을 허락한다.’

주인이 급전이 필요해 노비에게 돈을 받고 양인으로 풀어준 사례다. 전 교수는 “양반의 경제적 필요에 따라 속량해주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며 “조선 후기에 노비의 속량이 많아진 원인으로 그동안 학계는 ‘신분 해방을 향한 노비들의 열망’에만 주목해 왔으나 주인의 처지까지 균형 있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전경목#노비의 해방#브로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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