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日一夜萬死萬生 매 순간이 윤회인데 어찌 대충 살겠는가”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16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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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부처님오신날… 오현스님 인터뷰

“나마계고춘 흑우와사수(癩馬繫枯椿 黑牛臥死水). 병든 말이 말라비틀어진 담쟁이덩굴에 묶여 있고, 검은 소가 썩은 물 속에 누워 있어. 요즘 우리 정치와 종교가 그 꼴이야.”

설악산 신흥사의 큰 어른인 조실(祖室)이자 시인, 문화예술계의 후원자로 널리 알려진 오현 스님(81·사진). 부처님오신날(17일)을 앞두고 14일 서울의 한 식당에서 만난 스님은 원나라 청무 선사의 말을 빌려 “원래 무기력한 상태를 가리키지. 그렇지만 요즘 헛된 권력이나 힘을 좇는 자들에게도 꼭 들어맞는 말”이라고 일갈했다.

스님과의 약속은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밥이나 먹자”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메모도 할 수 없어 귀만 쫑긋 세우고 들은 스님의 ‘즉석 법문’은 불교계는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등 다양한 분야를 휘감으며 거침없이 흘렀다.

―곧 부처님오신날입니다.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간단하지. 스님과 불자들 모두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날이지. 부모는 부모 노릇을, 스승과 제자는 그 본분을 다하고 있는지 함께 반성하는 날이지. 이렇게 보면 꼭 불자가 아니더라도 모두 함께 뒤를 돌아보면 되지.”

―요즘 종교인들이 더 욕을 많이 먹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 종교인들이 존경받지 못하는 현실은 그들 스스로 물질화되고 외형적인 성공만을 추구하기 때문이야. 먹을 게 없으면 깨끗해져. 가난한 집 제사는 우애 있게 지내도 부잣집 제사는 싸움 나잖아.”

―지난해 동안거 해제 법문에서는 ‘절집에 부처가 없다’고 했습니다.

“맞는 말이지. 부처님 삶도 그렇잖아. 평생 먼지 나고 시끄러운 중생 곁에 계셨잖아. 그런데 어떻게 깨달음이 공기 좋은 절집, 산속에 있겠어.(웃음)”

―한동안 법문을 안 하셨는데요.

“내가 (법상에) 올라가면 꼭 ‘사고’가 나서. 입바른 소리를 해서 그렇지. 이렇게 저렇게 두루뭉술하게 덕담 하고 경전 구절도 읊으면 되는데 그걸 못 해. 억지로 말하기도 싫고 재미없어서 안 하게 됐어.”

스님 주변에는 유난히 사람이 많이 모인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롯해 한화갑 박지원 손학규 김진선 주호영 등 정치인은 물론이고 고은 신경림 신달자 오세영 시인,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등등. 좌우라는 이념도 상관없고, 분야도 다양하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종교는 기독교(개신교)이지만 오현 스님을 존경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권영민 단국대 석좌교수가 오현 스님의 시와 에세이를 엮어 최근 출간한 ‘적멸을 위하여’의 지은이 소개는 이렇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 산에 살며 시와 시조를 썼다.” 스님은 “뒤의 시는 볼 것도 없고, 이것만 참고하라”고 했다. 스님이 피운 웃음꽃의 꽃말은 솔직함과 자신을 낮추는 하심(下心)이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권영민 단국대 석좌교수가 오현 스님의 시와 에세이를 엮어 최근 출간한 ‘적멸을 위하여’의 지은이 소개는 이렇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 산에 살며 시와 시조를 썼다.” 스님은 “뒤의 시는 볼 것도 없고, 이것만 참고하라”고 했다. 스님이 피운 웃음꽃의 꽃말은 솔직함과 자신을 낮추는 하심(下心)이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 “아버지 보고 배운 朴대통령… 너무 과거에 사로잡혀 있어” ▼

―사람이 모이는 이유가 뭡니까.

“글쎄, 모르겠어. 그 얘긴 하지 말자. 솔직히 요즘 좀 사람이 싫어졌어. 허허.”

―공들여 운영해 온 만해마을을 얼마 전 동국대에 통째로 기부하셨는데요.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이제는 좀 알려져 만해마을과 만해축전이 돈이 되는 것 같았어. 어디가 제일 운영을 잘할까 생각하다 그래도 학교가 낫겠다 싶어 기부했어. 절집에 돈이 꼬이면 안 돼. 나 죽은 뒤 사고가 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섭섭해하는 상좌(제자)도 있겠습니다.

“없어. 섭섭해하면 그게 중인가.”

―최근 윤창중 씨 (성추행 의혹) 사건이 언론의 주요 뉴스입니다.

“내가 정치를 잘은 모르지만 (윤창중은) 재주는 있지만 살아 온 게 심했어. 독한 말로 남을 짓밟으면서 성공해 진실성이 없어 보였어. 임제록에 ‘금가루가 귀하긴 해도 눈에 들어가면 독이 된다’고 했어. 분수에 맞는 처신을 해야지. 토정 선생도 이런 말을 했어. ‘능히 벼슬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안 하는 것이 천금이다.’ 최하는 능력이 안 되는데 억지로 하는 거지.”

―박근혜 대통령의 인사에 대한 비판도 많습니다.

“중인 나도 스마트폰도 쓰고, 세상 바뀐 걸 알고 있어. 이때다 싶으면 벌써 저만치 가고 있는 게 요즘 세상이야. 그런데 박 대통령은 아직 아버지 밑에서 보고 배운 과거에 너무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아. 대통령이 스스로 앞장서 변해야 세상 사람들이 편해지는데….”

―정치판은 어떻습니까.

“사촌이 논 사도 배 아파하지 마라, 이런 마음이면 문제들이 대부분 해결돼. 내 허물은 안 보거나 줄이고, 남의 허물은 작은 것도 찾아서 키우니 맨날 싸움질이지.”

―불교가 어렵다는 이가 많습니다.

“그거 아나? 부처님 법문은 우리 속담에 다 있어. 내가 보기에 팔만대장경을 몇 마디로 요약하면 ‘남의 눈에서 눈물 나게 하지 마라’ ‘사람 차별하지 마라’ 이거 아니겠나. 얼마나 훌륭한 말이야. 이렇게 살면 세상 잘 돌아간다. 경전 밤낮 달달 외워서 얻어지는 게 깨달음이라면 천지에 깨달은 자들이야. 그럼 세상이 이 꼴이겠나?”

―나이든 스님 뵐 때마다 궁금했는데, 그냥 묻겠습니다. 스님은 깨달으셨나요.

“나는 가짜 중이야. 개인적으로는 도(道)도 깨달음도 없다고 생각해. 이렇게 얘기하면 몇 놈 죽자고 달려들 거다. 잘 써라. 서부영화 보면 카우보이가 황금을 평생 찾다 결국 못 찾고 죽잖아. 깨달음이란 게 그런 것 아닐까. 내게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쁘고 좋은 날은 죽는 날이야.”

―부처님이 바라는 세상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습니까.

“남편을, 아내를, 직장 상사를, 동료를 부처님이다 이렇게 여기면 되지. 꼭 절에 가서 절하고 보시하고 이래야 하는 게 아니야.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을 부처님으로 생각하고 공들이고 눈물 나지 않게 하면 되는 거지. 이게 사람들이 태어난 목적 아니겠나. 이걸 잊으면 안 돼. 또 경전은 여행을 위한 일종의 안내서나 가이드북이야. 깨달음 자체와 경전 자구에 집착하면 사람이 구속돼. 강을 건넜으면 뗏목은 버려야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난 윤회라는 게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서 윤회를 받는다고 생각해. 그러니 살아 있는 한 순간 한 순간이 중요한 거지. 일일일야 만사만생(一日一夜 萬死萬生), 하루 사이에 만 번 죽고 만 번 사니, 얼마나 열심히 살아야겠어.”

―아이들 때문에 고민하는 가정이 많습니다.

“정주영 책 한번 봐라. 정주영이 도망가니까 아버지가 쫓아가 잡았는데도 그 뜻을 꺾지 못하잖아. 그때 정주영이 ‘예’ 하고 아버지 뜻대로 살았으면 나중에 천하의 정주영이 됐겠나. 부처도 처자식 버리고 가출하잖아. 봐라, 김 기자야, 아들이 네 뜻대로 살면 잘해 봐야 잘난 기자밖에 더 하겠나.(웃음)”

그러면서 스님은 말을 보탰다.

“30여 년 전 내가 미국 구경 갔다 돈 떨어져 식당에서 접시를 닦았어. 근데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다니는 여학생이 우연히 부자인 아버지와 마주치는 것을 봤어. 짧은 영어로 ‘부자인데 왜 딸을 안 돕느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그 아버지가 ‘사람은 돈 버는 재미로 사는데, 그걸 뺏으면 딸은 어떻게 사느냐’는 거지. 그리고 자기 돈은 학교나 교회, 단체에 기부하면 된다고 하더라. 귀한 자식이면 세상 공부를 시키면서 기다려야지.”

스님은 만난 지 2시간 반가량이 지나서야 “나도 한때 인터뷰나 대중 법문을 좋아할 때도 있었어. 근데 20년 전에 ‘졸업’했다”면서도 마지못한 듯 “그래, (인터뷰하고) 사진도 찍자”고 말했다.

사람들은 스님에게 와서 한결같이 길을 묻고, 다시 길을 떠난다. 3시간의 짧은 만남은 그 이유를 알려줬다. 스님과 오랜 인연을 맺어 온 홍사성 불교평론 주간의 말이다. “스님이야 솔직하고 거침이 없는, 이른바 ‘중물’이 제대로 들었죠. 어느 때는 법(法·말)으로 돕고, 명분이 있다면 주머니를 탈탈 털어 도우니 사람이 안 모일 수 없죠.”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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